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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 1225-1011(Print)
ISSN : 2288-1727(Online)
The Journal of Fisheries Business Administration Vol.45 No.3 pp.39-53
DOI : https://doi.org/10.12939/FBA.2014.45.3.039

The Research Process and the Problems in Statistics of The Chronicle of Korea Fishery

Kun-Woo Rhee*
Department of History, Pukyong National University, Busan, 608-737, Korea

† 이 논문은 2013년 부경대학교 자율창의연구비의 지원으로 연구된 것임.

Corresponding author: 051-629-5428, kwrhee@pknu.ac.kr
November 6, 2014 December 15, 2014 December 17, 2014

Abstract

This paper is to survey the research process and the problems in statistics of The Chronicle of Korea Fishery. The contents of The Chronicle were researched by two groups. One group is the managers of every province, the other group is the officers of every county. The managers performed the literature investigation research and field study and also arranged the reports from the county officers. But the managers seemed not to pay the full attention about the consistency of contents. The main contents about fishery are the number of coastal households and population, the number of fishery households and population, the number of fishing boats and fishing net. The body of The Choronicle and the table of fishing affairs in the appendages must be carefully compared to use the statistics. Though these statistics lack the consistency, the number of fishery households and boats deserves the attention. The fishing households account for less than 3% of all households, and about one third of fishing households has fishing boat.


『韓國水産誌』 의 조사방법과 통계자료의 문제점†

이 근우*
부경대학교 인문사회과학대학 사학과

초록


    Pukyong National University
    2013AA053

    I.서 론

    『한국수산지』 는 1908년부터 1911년에 걸쳐 간행된 조선 수산업에 대한 조사보고서이다. 일 본에 의한 조사이기는 하지만 조사내용이 다양 하고 그 양도 방대하여 1910년을 전후한 시기의 조선의 수산업 현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 고 할 수 있다. 1907년에 통감부의 관제 개편이 이루어졌고, 대한제국의 농상공부에 수산국이 설치되었다. 이때부터 5개년에 걸쳐 전국의 수 산업 현황을 면밀하게 조사하였다.『한국수산 지』 는 일본에 의한 조선의 수산업 현황을 종합 정리한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다1. 일제는 이것 을 통하여 조선 수산업의 현황을 파악하여 일본 어민으로 하여금 조선 연해에 진출하게 하고, 나 아가 조선 어업을 통제할 수 있었다2. 따라서 우 리 학계에서는『한국수산지』 를 이용하여 당시 의 수산업을 복원하기 위한 여러 가지 연구를 수 행해 왔다3.

    이 글에서는 우선『한국수산지』 의 내용을 통 하여 구체적인 조사작업이 어떻게 수행되었는 지를 살펴보고, 나아가서 인구 및 어업 관련 통 계자료의 문제점을 지적해 보고자 한다. 『한국 수산지』 라는 방대한 자료가 편찬되었지만, 구 체적인 조사과정에 대한 정보는 극히 부족한 실 정이다. 한편,『한국수산지』 의 자료는 여러 가 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방대한 조사사업의 결과 이고 또한 1910년을 전후한 조선 수산업의 실상 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자료이기는 하지만, 한편 으로는 대단히 불완전하고 부정확한 측면도 간 과할 수 없다4.『한국수산지』 를 연구자료로 쓰 고자 할 경우 자료가 갖는 특징과 한계점을 분명 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한국수산지』 에 보이는 통계자료의 문제점을 지적해 보고자 한다.

    II.한국수산지의 군별 기재와 조사방법

    『한국수산지』 는 1908년에 1권이 출간되었고, 1910년에 2권과 3권, 1911년에 4권이 각각 출간되 었다. 조사를 수행한 핵심적인 인물을 Table 1에 서 보는 바와 같이 대부분 일본 최초의 수산교육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水産傳習所5 출신들이었 다6. 이들이 각 구역을 분담하여 집필하고 이를 편 집하여『한국수산지』 로 출간한 것이다(Table 1). 조선의 연안 전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수 산업의 실태를 단기간에 정밀하게 조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작업이었을 것이다.

    『한국수산지』 의 서문에 의하면 조사에 착수 한 것은 1907년(隆熙원년, 明治40이고, 1908년 (隆熙2)과 1909년(隆熙3)에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함경북도부터 평안북 도에 이르는 해안의 실태를 담은『한국수산 지』 2권과 3권이 출간된 것이 1910년이므로, 실 제로 조선 해안의 현지 조사작업이 수행된 것은 불과 2년 정도의 기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7.

    아울러서 조사자에 의한 편차, 조사여건의 편 차 등 다양한 이유로 판단해 봐도『한국수산 지』 에서 전체적인 통일성을 기대하기란 애초부 터 무리였다고 할 수 있다.

    1.군별 기재방식

    이제 실제로 조사된 내용을 비교해 보고자 한 다.『한국수산지』 2권 경상북도 영일군과 경상 남도 울산군,『한국수산지』 3권의 전라남도 해 남군과 충청남도 당진군을 비교의 대상으로 삼 았다. 네 군은 각각 동해안, 남해안, 서해안에 위 치하며 어업이 활발한 곳이었다. 행정구역상으 로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충청남도에 서 각각 한 군씩 선정한 것이다. 수록 내용에 있 어서 4개의 군은 거의 비슷한 분량이다.

    『한국수산지』 의 이들 군에 대한 『한국수산 지』 의 기재에서 각각의 차이점을 지적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군 별 기재의 일관성이 결여 되어 있다. Table 2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각 군마다 첫머리에 연혁, 경역, 하천, 장시, 호구, 물산, 구획을 기록하고 읍면 별로 연안 마을의 조사 결과를 기록하는 대략적인 원칙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세부로 들어가서 보면 각 항목이 모두 기록되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경상북도 영일군에서는 하천과 호구에 대 해서 군의 개략에 자세히 기록하였으나 다른 군 에서는 전혀 확인되지 않았으며, 반대로 영일군 에는 물산에 대한 내용이 없는 반면 다른 군에서 는 비교적 상세하게 주요 물산을 기록하였다. 특 히 경상북도와 경상남도 동부 즉 강원도 이남의 해안지역은 林駒生29이 조사책임자였는데, 군 별로 기재방식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둘째, 군 별로 조사의 精度에서 큰 차이가 난 다. 충청남도 당진군처럼 각 마을의 戶를 정확 히 파악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전라남도 해남군 처럼 호구는 전혀 기재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 이 에 대해서 해남군에서는 설망의 설치방법 등에 서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만, 당진군에 서는 魚箭등에 대한 설명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경향은 도 별 기재 사이에서만 확인되 는 것이 아니라, 같은 도 안의 군 별 기재에서도 확인된다. 예를 들어 영일군의 경우는 읍면 아래 연안의 마을 하나하나 대해서 항목을 설정하고 그 마을의 정황을 기술하고 있지만, 같은 경상북 도에 속하는 영해군과 영덕군에서는 면 단위까 지만 기록하였으며, 영해군에서는 유일하게 丑 山을 독립 항목으로 설정하였고, 영덕군에서는 마을 항목을 아예 설정하지 않았다.

    셋째,『한국수산지』 의 본문에서 다루어진 내 용이 2권 이하의 말미에 있는 「漁事一覽表」 와 서로 유기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점에서 본문의 조사자와 「漁事一覽表」 의 조사자가 서로 달랐 음을 보여준다. 또한 「漁事一覽表」 내에서도 군 별 조사내용이 서로 다르다. 이는 「漁事一覽 表」 의 조사자가 군 별로 독자적으로 조사하였음 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연안의 각 군이 제출 한 어촌포어업 사항 조사보고서에 의거한 것으 로, 개별적인 사항이나 수치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서로 일치하는 경우 가 예외적이다30.

    아울러 『한국수산지』 가 조선의 수산업 상황 을 조사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이기는 하였지만 실제로는 地理誌의 성격이 강하다는 점도 주목 할 필요가 있다. 전체적으로 해안의 형상, 해저 의 토질, 포구의 위치 등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지만, 어호 어업 및 제염 등 수산업 일반의 정보는 반드시 풍부하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농업 현황, 농작물의 종류 및 생산량, 포 구의 수출입 품목과 물량까지 기록한 경우도 있 어서 조사가 수산업에 한정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한국수산지』 의 기본조사는 군별로 기초 조사를 수행한 담당자가 있었고, 다시 도별로 통 감부 혹은 조선해수산조합의 기수 및 기사인 책 임자가 현지를 조사하는 한편, 군 별 조사보고서 를 수합하는 형태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도 별 책임자가 직접 현지를 조사한 사례로는 강원도의 경우 강릉, 양양, 간성, 고성, 통천은 농 상공부 기수 正林英雄이 조사하였고, 같은 강원 도의 간성군 거진에서 평해군 지경까지는 통감 부 기수 中西楠吉이 조사하였다. 한편으로 통천, 고성, 양양, 삼척, 울진, 평해 각 군은 강원도 觀 察道廳의 어업조사보고에 의거하였다31.

    그러나 도별 조사책임자가 군 별로 조사된 내 용을 반드시 도 단위로 통일해서 정리하려는 노 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그 중에서도 『한국수산지』 의 가장 기본적인 편찬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수산업의 현황에 있어서 도, 어업에 종사하는 戶에 대한 조사는 소홀한 편이다. 이를 표로 정리해 보면 Table 2와 같다.

    이러한 차이를 수산 관련 정보라는 측면에서 좁혀서 살펴보도록 하자.『한국수산지』 에서 최 소 기재단위는 마을(촌락)이라고 할 수 있다. 마 을과 관련된 내용을 망라하면 상대적인 위치, 주 변 지형, 해안 지형, 해저지형, 인접 마을과의 거 리, 총호수, 인구, 어호수, 어선, 그물, 수산물의 종류 등 실로 다양한 정보를 다루고 있다. 그러 나 각 마을의 기재는 반드시 이러한 내용을 다 갖추고 있지 않다. 이를 구체적으로 정리해 보면 Table 3과 같다.

    개별 항목으로 선택한 서수라, 주문진, 법성포, 가의도, 대연평도 등은 가장 기재가 충실한 사례 를 뽑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별 기재와 마찬가지로 마을 별 기재에서도 내용의 차이가 상당한 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서 수라와 주문진에서는 해저의 상태에 대해서 언 급하지 않았는가 하면, 주문진과 법성포에서 인 구나 어로 형태를 다루지 않았다. 서수라에서는 어기 어획량 및 어가 등의 정보가 결락되어 있으 며, 농업과 관련된 정보도 일정하지 않다. 법성포 와 가의도에서는 그물 설치에 관한 정보가 없다.

    2.조사방법

    『한국수산지』 의 조사방법은 무엇보다도 『한국수산지』 각 권의 서문을 통해서 알 수 있 다. 특히『한숙수산지』 2권의 경우에는 서문에 자료를 열거하고 있는데, 그 자료는 크게 4가지 로 나눌 수 있다. 우선, Table 1에서 확인할 수 있 는 농상공부 기수 및 통감부 기수 및 기사들이 직접 현지를 조사한 자료, 다음으로 연해 각 군 수가 제출한 「어촌포어업사항조사보고서」 , 셋 째 참고서류, 넷째 참고지도가 있다. 특히 셋째 로 든 참고서류는 34종에 이르는데, 그 중에서 직접 수산업에 관련된 것으로는『한해통어지 침』 ,『한국염업조사보고』 ,『조선해수산조합보 고』 가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군 별 조사와 수산업 관련 기수 및 기사가 직접 조사한 두 가지 내용 이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군 별 기재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것도 군수들이 제출한 「어촌포어업조사보고」 자체가 균질적 이기 않았기 때문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수산지』 3권의 경우에도 각 지역의 조 사를 분담한 통감부 및 농상공부, 조선해수산조 합의 技手들이 조사하여 제출한 자료 이외에도 新義州理事廳이 제출한 평안북도 수산조사보고, 연안 각 군수가 제출한 「어촌포어업사항조사보 고」 등을 활용하고 있다37.『한국수산지』 의 본 문과 「어사일람표」 의 편집 과정을 정리하면 Table 4와 같다.

    또한 『한국수산지』 의 내용을 통해서 당시 조 사방법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간조 시에 갯벌에 남아있는 물길을 통해서 어느 정도 의 거리를 항해할 수 있다든지, 해남에서 완도까 지 얼마라는 등의 수치는 직접 배를 타고 다니면 서 얻은 비교적 신뢰할 수 있는 수치이다. 그러 나 모든 지역에서 직접 연안 마을에 상륙하여 각 마을의 수산업의 실상을 조사하지는 않은 것으 로 보인다. 즉 호수는 자세히 기록하였으나, 어 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언급하지 않은 경우가 적 지 않다. 이는 배 위에서 마을을 관찰하였기 때 문에 그 마을에 몇 가구가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있으나 그 중 어업에 종사하는 호구가 얼마인 지는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서해와 동해에서 실제 조사방법이 다를 수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그 내용의 차이 가 커진 것이다. 한편으로는 서해는 갯벌이 넓기 때문에 배를 부리는 것도 어렵고 또 갯벌에 어패 류 등을 채집할 수 있는 경우도 적지 않으므로, 동해안과 비교하여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어선의 수나 어민의 수가 적었던 것도 그 원인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당시 특히 서해의 연안 마을에 직접 상륙 하여 수산업 현황을 조사할 만한 충분한 시간도 없었고, 당시 일본인 조사자가 살해당하는 등의 사건도 있어서 상륙해서 조사하는 일을 용이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40. 특히 전라도나 충청∙경 기도 해안과 같이 갯벌이 넓게 펼쳐져 있는 곳은 더욱 조사가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예상과 달 리 전라도 충청도 등의 수산업이 극히 저조한 것 으로 보고한 것은 당시의 실상이라기보다는 조사 방법의 한계에 기인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함경도 및 강원도와 같이 해안이 단조롭 고 연안 마을에 접근이 쉬운 곳에서는 어호뿐만 아니라 어획량까지 자세히 기록한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면, 동해안에 비하여 서해안의 조사가 어려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충청 도 등지에서는 면 단위만 기록하고 개별적인 연 안 마을을 다루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다.

    구체적인 조사 방법을 보면, 주로 군함이나 조 선해수산조합 소유의 순시선(순라선), 어선 등 을 타고 연안을 다니면서 해안 지형 등을 관찰하 고 수심을 재고 큰 배를 댈 수 있는 항구인 경우 에는 타고 간 배로 직접 접안 상륙해서 호구 조 사 등의 작업을 수행하고 사진을 촬영하였다41.

    그래서『한국수산지』 각 권의 첫 머리에는 수 십 장의 포구 및 조업 현황 등에 대한 사진이 실 려 있는 것이다. 직접 접안할 수 없는 포구인 경 우에는 해상에서 망원경 등으로 관찰하거나 작 은 배를 내려 접안하는 경우가 있었던 것으로 보 인다. 작은 포구인 경우에도 포구의 뒷산에서 아 래를 내려다보면서 찍은 사진들이 종종 보이기 때문이다42. 또한 해상에서 만난 일본 어선으로 부터 어황 등을 물어 확인하는 경우도 있고, 직접 적인 조사 이외에도 군의 행정 계통을 통해서 파 악∙보고되는 내용을 기재한 경우도 확인된다.

    III.『한국수산지』 통계자료의 문제점

    1910년대 초반까지는 아직 조선의 호구를 정 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단계였다. 여러 기관이 조 선의 호구를 파악하였으나 각 조사는 상당한 차 이를 보이고 있다43. 특히 1904년에서 1906년 사 이의 조선의 인구통계는 정확한 수치가 아니고 추정치이다. 이후에도 각종 통계에서 근사한 수 치이기는 하지만 서로 다르게 파악한 경우가 적 지 않다. 이처럼 호구 통계자료가 불안정한 시기 였기 때문에 『한국수산지』 의 자료를 이용하고 자 하면,『한국수산지』 가 어떤 호구자료를 사용 하였는지 또한『한국수산지』 자체의 자료는 정 확한지를 먼저 판단할 필요가 있다. 이제『한국 수산지』 의 호구자료가 갖는 특징과 어호 어선 등의 수산 관련 통계자료는 정확한 것인지를 조 사과정과 연관시켜 알아보고자 한다.

    1.호구자료

    먼저 『한국수산지』 에 보이는 도별 호구자료 에 대해서 살펴보자. 조선의 인구를 본격적으로 조사한 것은 1907년이며 그 결과가『韓國戶口 表』 이다. 조선의 호구에 대한 자료를 연도순으 로 정리해 보면 Table 5의 「조선의 호구 변화」 와 같다44. Table 5에서 보는 바와 같이, 특히 통 감부 시기에 조선 호구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 기는 했지만 극히 불완전했고 서로 다른 자료가 통용되던 상황이었다. 다만 이는 호구조사의 결 과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조사에서 누락된 인 구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1910년의 조선의 호수 및 인구는 자료마다 다 르게 나타나고 또한 어느 정도로 정확히 파악하 였는지 알 수 없다. 1911년 6월 말에 조사한 통계 자료를 이용한 『最近朝鮮事情要』 (조선총독부, 1912)에서는 호수 2,792,105호, 인구 1,3539,218 인으로 나타나 있다45.

    가까운 시기의 통계수치이지만 큰 차이를 보 이고 있으나,『最近朝鮮事情要』 의 통계치는 조 선총독부에서 직접 조사한 자료이므로 실제 상 황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수산지』 의 통계치도 호수에서 약 40만, 인구에서 약 500만의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인구 약 970만이라는 수치는 1910년대 초까지 일반적으로 일본에서 인식하고 있던 조선의 인 구로 생각된다. 또한 1910년 조선의 실제 인구는 최소 1,500만 이상에서 최대 1,750만 정도로 추 정하고 있다46.

    『한국수산지』 1권의 개관에서 제시한 호구 수(Table 6)는 1907년 5월의 조사에 의거한 『한 국호구표』 54와 가장 근접한다. 그렇지만 정확하 게 일 치 하 지 는 않 는 다 55. 우 선 전 자 에 서 는 2,322,230호, 9,638,578인으로 되어 있으나, 후자 에서는 2,333,078호, 9,781,671인으로 되어 있다. 전체 호구수는 10,848호, 143,093인이 차이가 난 다. 그러나 도의 경우에도 함경북도 72,925호 390,045인, 함경남도는 127,076호 582,463인으로 되어 있으며, 영일군56의 호구도 3,476호, 인구 16,931인이다. 이 수치는 모두『한국호구표』 (政 府財政顧問本部, 1907)와 같다57.

    즉『한국수산지』 는 전체 호구에 대한 정보는 『한국호구표』 와 차이를 보이지만, 개별적인 수 치는 일부 도 및 군의 호구는 『한국호구표』 에 의거하고 있다. 일치하는 곳은 함경북도, 함경남 도, 강원도, 전라북도, 충청북도, 평안남도, 평안 북도이고 나머지 도는 호구수가 다르다58. 이는 1907년 5월 이후 1909년 12월『한국수산지』 1권 이 간행될 때까지 각 도별로 새롭게 파악된 정보 를 반영한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한국수산지』 의 호구는『한국호구 표』 를 기준으로 하면서 조사과정에서 새롭게 파 악된 호구는 부분적으로 수정한 것임을 알 수 있 다. 그러나 Table 5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1907 년의 호구수는 대한제국 정부재정고문본부가 최초로 시행한 본격적인 호구 조사의 결과이지 만 1909년의 호구수가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 는 점에서 대단히 불완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 다. 따라서『한국수산지』 의 통계자료를 분석하 고자 할 때 과연『한국수산지』 의 호구자료를 그 대로 사용할 수 있는지가 문제가 된다.

    한편『한국수산지』 호구자료의 특징은 연해 군의 호구 및 어업자 호구를 중심으로 파악한 점 이다.『한국수산지』 2권부터 4권까지 말미에 「漁事一覽表」 (其一)이라는 제목으로 표가 게 재되어 있다. 각 표에서는 郡面里洞까지 구분하 여 총호구 어업자 호구 등의 통계자료를 제시하 였다. 이를 도 별로 정리한 것이 Table 6이다. 「어 사일람표」 에서는 咸鏡北道慶興府安和面의 총 호구 어업자호구를 각각 114호 772인 41호 224인 이라고 하였다.『한국호구표』 의 慶興府安和面 을 살펴보면, 호구가 129호 811인으로 되어 있다. 다른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여서,『한국수산지』 의 군 별 총호구는 해당 군의 전체 호구수가 아니 라, 연안에 위치한 마을의 호구만을 조사한 것임 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한국수산지』 는 조 선 연안의 호구와 漁戶에 대한 최초의 조사결과 라고 할 수 있으며, 1910년 단계의 漁戶에 대한 유일하고 종합적인 자료라고 평가할 수 있다.

    2.통계자료의 문제점

    한편, 「어사일람표」 의 호구 통계자료를 통해 서도 조사과정에서 지적한 군 단위 기초 조사의 비통일성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총호구와 어업자호구 항목에는 다시 하위 항목으로 호수 와 인구가 설정되어 있지만, 각 군이 보고한 결 과는 총호구의 호와 어업자호구의 호만 파악하 고 각각의 인구는 파악하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 다. 함경북도의 경우를 보면, 富寧郡, 明川郡, 吉 州郡, 城津府는 총호수와 어호수만 기재되어 있 다. 따라서 「漁事一覽表」 에서는 총호수와 어호 수, 어선수, 그물수, 어전어장수만 도 별로 합계 를 내고 나머지는 공란으로 두었다. 즉 총인구와 어업인구는 다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합계 를 낼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총호수 및 총인구수는 연안의 마을 전체 를 대상으로 파악하는 것이 원칙이었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연안 마을 전체를 파악한 군도 있는가 하면 한 면에서 대표적인 한 마을만 파악한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慶興府의 경우 西 面은 西水羅, 海面은 雄基浦만을 대상으로 하였 고, 富寧郡의 경우 海面은 板津, 三里面은 沙津, 東面은 雙津과 같이 한 마을만을 대상으로 하였 다. 이에 대해서 鏡城郡의 경우는 龍城面은 鹽盆 洞浦項洞五柳洞60, 梧村面은 長淵洞獨津洞元鄕 洞, 朱乙湯面은 錢山洞執三洞溫大津洞南夕津 洞鹽盆津과 같이 연안 마을을 모두 조사한 경우 도 있다. 따라서 부령군과 같은 경우는 해당 군 연 안 마을의 온전한 통계치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경상남도의 사례를 통해서『한국수산지』 의 총호구가 연안 마을만을 대상으로 하였다는 사 실을 확인해 보자.『한국수산지』 의 경상남도 호 구 자료인 Table 7과『경상남도도세요람』 (이하 『도세요람』 )의 호구자료인 Table 8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듯이『한국수산지』 의 총호구는 연 안 마을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나아가서 Table 7은 연안에 위치한 면리동을 단위로 호구 와 어호구를 조사한 것이고, Table 8은 연안에 위 치한 군의 전체 호구와 어호구를 보여 주는 것이 다. 그러나『한국수산지』 의 경우 그 연안 마을 도 전부 조사한 것은 아니다. 두 표를 비교해 보 면, 어호구의 수가『한국수산지』 쪽이 많다. 『한국수산지』 의 조사 과정과 통계자료에 많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도세요람』 의 조사 보다 어호는 500호, 어구는 적어도 1,000명 정도 가 많은 것은『도세요람』 쪽이 더 정확하게 파 악한 결과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농업과 어 업을 겸업하는 경우『한국수산지』 에서는 어호 로 파악하는 경우가 있었다면,『도세요람』 에서 는 당사자의 주장이나 조사자의 판단에 따라 어 호가 아닌 것으로 간주한 경우가 발생했을 수 있 다. 어선수는『도세요람』 쪽이 더 많은 것을 보 면 그러한 추정이 가능하다.

    다음으로『한국수산지』 본문의 기재와 말미 의 「어사일람표」 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 도 적지 않다는 점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차이를 정리해 보면, 1) 본문의 기재와 「어사일 람표」 의 통계치가 다른 경우, 2) 본문에는 기재 되어 있으나 「어사일람표」 에는 자료가 없는 경 우, 3) 본문에는 기재되지 않았으나 「어사일람 표」 에는 자료가 있는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예를 들어 1) 吉州郡日下津의 경우 총호수가 53호라고 하였는데 「어사일람표」 에는 50호라 고 하였고, 어호 및 어선에 대한 기재는 없는데 「어사일람표」 에는 어호 18호 어선 5척으로 기 재하였다. 明川郡三達津의 경우 본문에서는 총 호가 39호라고만 하였으나, 「어사일람표」 에서 는 총호 29호 어호 4호 어선 2척이라고 하였다. 앞에서 제시한 영일군의 경우도 본문에 北面浦 項의 경우도 전체 호구 400호 어선 7척이라는 내 용이 있지만 「어사일람표」 에는 총호 397호 어 선은 2척이라고 하였다. 蔚山郡江東面의 경우 도 본문에서는 亭子浦에 인가 68호 어선 9척이 라고 하였는데, 「어사일람표」 에서는 총호수 85 호 어선 2척이라고 하였다. 2) 明川郡國津의 경 우, 인가 120호 명태의 1개년 생산액 70태 가격 으로 27관 200문이라고 하였으나, 「어사일람 표」 에는 아예 國津이 들어 있지 않다. 앞에서 제시한 당진군의 경우도 본문에서는 高山面의 九老之里와 長項, 下大面등도 언급하고 있지만 「어사일람표」 에는 들어있지 않다. 外孟面의 경우도 通丁油峙松洞讚洞外倉三串의 총호구 와 熊浦德巨도 연안 마을로 언급하였지만, 「어 사일람표」 에서는 高山面은 다루지 않았고, 外 孟面에서는 松洞(松堂) 油峙德巨通丁만 다루 었다. 즉 본문과 「어사일람표」 가 서로 긴밀하 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향으 로 조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吉州郡의 洋島 의 경우, 본문에는 전체 호 및 어호에 대한 기록 이 없으나 「어사일람표」 에는 양도진에 총 19호 어호 9호 어선 3척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길 주군 대포진의 경우는 본문에는 전혀 기재되지 않았으나, 「어사일람표」 에는 총호 12호 어호 8 호 어선 2척으로 되어 있다. 해남군의 경우에도 여러 마을에 대해서 지리적인 정보나 그물을 설 치하는 방법 등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있으 나 정작 호구나 어선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렇 지만 「어사일람표」 에서는 어호과 어선의 수를 여러 마을에 대해서 기록하였다63.

    한편, 明川郡下古面의 예를 보면, 본문에서는 葛麻浦, 國津, 佳湖, 黃岩津, 厚生津의 5개 마을 을 다루었으나, 「어사일람표」 에서는 葛麻津東 湖津治宮津露績津佳湖津仙倉津新津黃岩津 厚里津井湖津의 10개의 마을에 대한 통계치가 제시되어 있다.

    본문 내용의 조사와 「어사일람표」 의 조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고 정리되었는지는 정 확히 알 수 없으나, 함경북도의 경우 본문은 도 별 책임자가 직접 조사한 것을 바탕으로 하고, 「어사일람표」 는 군 별로 보고된 내용을 바탕 으로 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사일람 표」 에 보이는 총호수, 어호수, 어선수가 군 별로 일관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본문이 다루 고 있는 마을보다 많으며 총호수 등의 정보가 자 세하므로 군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조사한 것 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 도 별 책임자가 현지가 가서 조사 할 경우는 정확한 총호수와 어호수 어선수를 파 악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앞 장에서 제 시한 울산군 해남군 등의 내용에서 볼 수 있듯이, 현지에서 조사할 수 있는 내용 즉 직접 관찰할 수 있는 지리적 정보 및 어업현황 및 농업현황, 현 지 주민에게 물어서 알 수 있는 어획고나 漁稅의 납부 실태 등이 자세한 특징을 보인다. 특히 농 업과 관련된 정보가 자세한 것은 어촌 마을로 판 단하고 상륙해서 조사한 결과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하고 여가에 해안에서 漁採를 행하는 경우 가 적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군 별 보고서는 당연히 어업과 관련된 조사였기 때문에 어업과 관련된 내용만 조사하였을 것이므로 농업과 관 련된 내용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한국수산지』 의 통계자료는 불완전 한 자료이지만『한국수산지』 부록의 자료로 일 부 보완하여 작성한 전체 호구 및 연안 호구, 연 안 호구 중의 어호의 비율을 개략적으로 제시 하면 Table 9와 같다. 총호 중 어호가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적으로 3% 미만이며, 어호 3호가 어선 1척 정도를 보유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64.

    IV.결 론

    이 글에서는 『한국수산지』 의 조사 방법과 통 계 자료의 문제점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하였다. 조사는 크게 두 축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도 별 책임자(技手)와 군의 조사자이다. 도 별 책임자 는 현지에 직접 가서 조사를 수행하여 이를 편집 자에게 제출하였다. 군에서는『한국수산지』 2 권부터 그 말미에 게재되어 있는 표의 자료를 작 성하여 편집자에게 제출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 자료를 받은 편집자는 도 별 책임자가 조사한 내 용과 군이 제출한 조사자료를 수합하였지만, 이 두 가지 자료를 정밀하게 대조하거나, 군 별 기 재의 차이를 통일하려는 노력을 크게 기울이지 않았다. 군이 조사한 내용은 가장 충실한 것은 漁戶와 漁船의 수이다.

    『한국수산지』 1권의 호구자료는『한국호구 표』 를 바탕으로 하면서 새로운 자료를 보완한 것이다. 그러나 각 권의 호구자료는 연해 마을의 호구를 중심으로 한 것이지만, 모두 망라한 것이 아니다. 특히 현지 조사에서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내용을 군의 조사를 통해서 보완해 줄 것을 기대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군의 조사도 일관성 이 없고 빠진 부분이 적지 않다. 또한 본문의 내 용과 표의 내용이 서로 다른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도 확인되었다. 따라서『한국수산지』 의 자료 를 통계적으로 이용하려고 할 경우에는 반드시 본문과 표의 내용을 대조하여 보완하여야 한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한국수산지』 는 1910 년을 전후한 조선 수산업의 현황과 연안 마을들 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는 유일한 자료임은 분 명하다. 당시 조선의 총호 중 어호가 차지하는 비율은 3% 미만이며, 어선은 어호 3호가 1척 정 도의 비율로 보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Figure

    Table

    The Researchers by Province of The Chronicle of Korea Fishery

    The Changes in County Record in The Chronicle of Korea Fishery

    The Contents by Village in The Chronicle of Korea Fishery

    The Process of Editing

    The Change of Population Census in Korea

    The Fishing Household by Province in The Chronicle of Korea Fishery

    The Fishing Households of Gyungsangnamdo Province in The Chronicle of Korea Fishery in 1910

    The Households and Fishing Ships of Gyungsangnamdo Province in The General Survey of Gyungsangnamdo Province(1911)

    Statistic of Fishing Household by Reg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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