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 2288-1727(Online)
DOI : https://doi.org/10.12939/FBA.2015.46.2.075
A Study on Fisheries Business Trends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Colonial Rule in Tongyeong based on Fisheries Status, Catches and Issues
Abstract
Generally, the outcomes of the historical study in some domain would be a most fundamental and basic reference for understanding the essential and core component of them. Specially in case of social science, the importance of historical research much more emphasized that would be divided into independent academic field. In Korean history including fisheries business and industry, the most remarkable historic event would be the period of Japanese colonial rule that one of the most obstacle should overcome.
The aims of this study are exploring the fisheries trends and status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colonial rule in Tongyeong and finding out the overall major fisheries business issues that would be a better understanding the Korean fisheries industry. Achieving that Objectives, over 800 articles of media,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and other historical data were gathered, refined and analyzed.
This paper focused on of major fisheries topics and issues that including overall fisheries status, trends, fisheries catches, local fisheries cooperatives and fisheries exhibition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colonial rule in Tongyeong.
The result of this study shows that the status of fisheries in Korea had been deteriorated for exploitation of Japanese imperialism and Japanese fisheries capitalist during that period. Though the level of Tongyeong in fisheries was very high in terms of catches ratio and population of fisherman, the distribution networks of fishermen’s association was not good enough. And the Tongyeong fisheries exhibition in 1922 has positive aspects for considering both composition of organization and educational activity.
Even though the results and findings would be a helpful guidelines for understanding the fisheries business trends and status under the rule of Japanese imperialism, more research and study of that should be accomplished.
초록
Ⅰ. 서 론
우리나라의 어업·수산업은 3면이 바다라는 지리적 여건과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천혜의 자연 및 환경적 요인을 배경으로 상당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또한 지금까지 국가 경제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음은 물론이고 사회적 및 문화적인 영향력이 상당한 산업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 러한 대내외적인 중요한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 하고 현재 어업과 수산업에 대한 역사적인 차원 에서의 학술적인 연구나 조사는 상대적으로 다 소 미흡하다.
한편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중 요한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일본제국주의 강점기의 어업과 수산업에 대한 연구는 당시 산 업적 특징과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는데 상당히 중요하고 또한 식민사관(植民史觀)의 극복을 통 한 민족사관의 정립이라는 차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말과 대한제국 그리고 일본제국주 의 강점기에 우리나라의 수산업과 관련된 연구 들은 주제에 있어서 본다면 어업협동조합 혹은 수산업협동조합에 대한 연구(Choi, 1980; 1981) 나 일본제국주의의 어업 수탈에 대한 연구(Jang, 2011)와 같이 특정 분야에서는 탁월한 역사적 고증과 검증을 통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특 정의 주제의 집중된 경향이 있으며 또한 이러한 주제 외에 다른 분야에 대한 연구들은 최근 들어 서 거의 논의가 되고 있지 않아서 다양한 연구 주 제들에 대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전국적인 단위가 아닌 지역의 어업이나 수산업의 동향이나 현황 등에 대한 연구는 부산 을 중심으로 하는 일부의 연구들(Kim, 2007; Shim, 2011)과 서해안 일부 지역에 대한 연구 (Kim et al., 2004)를 제외하고는 거의 전무한 실 정이다. 이러한 주제의 다양성의 문제나 지역에 대한 연구들이 많지 않은 이유로는 당시의 시대 적, 역사적 상황과 현황에 대한 자료들이 현재 충분히 확보되어있지 못하고 대부분 소실되거 나 유실된 점을 들 수 있으며 또한 이러한 자료 들이 최근 디지털화와 전자문서화를 통해서 어 느 정도의 개선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도 현실적으로 접근성이 다소 떨어진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어업 및 수산 분야 에서 관련된 인력이 충분하지 못하여 연구의 영 속성이나 지속적인 심층연구가 다른 학문분야 에 비하여 미흡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연구에서도 이러한 태생적인 제약은 존재 하지만, 기존의 제한된 자료들을 중심으로 하는 선행연구들을 기반으로 보다 다양한 문헌, 언론 매체 등을 토대로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동안 의 수산업분야에서 중심이 되었던 지역 중 하나 인 통영을 대상으로 당시의 동향과 주요 특징들 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를 통하여 그 당시 통 영의 수산산업의 실상을 규명하고 일본제국주 의의 착취, 수탈과 관련된 정책이나 동향을 이해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연구로써의 의의를 가지 고자 하였다.
연구의 구성과 진행은 먼저 해당 주제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이러한 자료를 근거로 대한제 국과 일제 강점기 당시 우리나라 어업과 수산업 의 동향에 대해서 분석하도록 하였으며, 연구에 사용될 1차 자료 수집은 언론매체, 조선왕조실 록, 조선총독부관보와 기타 문서 등을 대상으로 통영지역의 수산업과 관련된 내용을 다루고 있 는 문헌을 표본으로 수집하였다. 이 중에서 언론 매체의 경우에는 현재 접근이 가능한 시점이 소 위 일본제국주의의 문화정치시기인 1920년경 대부분 창간되어 이 기간을 중심으로 조사하였고, 다른 문헌들은 대부분 해당시기 전부를 대상 으로 표본으로 선정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수집된 자료들은 800여 건이 넘는 언론자료를 중심으로 총독부문서와 통감부문서 등이 조사대상 문헌으로 추출되었 고 이중에서 다시 통영지역의 어업 및 수산업의 현황을 다루고 있는 주요 문헌들을 재정리하였 다. 정리된 자료들을 토대로 통영지역의 현황과 동향 그리고 어업 및 수산업과 관련된 주요한 논 제별로 정리하도록 하였으며 이러한 연구내용 과 분석을 통해서 일제강점기 어업 및 수산업과 관련된 중요 역사적 사건들과 동향들의 주요 내 용과 의미를 분석하도록 하였다.
Ⅱ. 일제강점기의 어업 및 수산업 개관
1. 일제강점기 경남지역의 어획고 동향
일제강점기 통영지역의 수산현황을 분석하기 에 앞서 당시 대한제국과 경남지역의 수산현황을 어획고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의 Table 1 과 Fig. 1로 나타낼 수 있다. 해당 통계자료의 주 요 출처는 조선총독부통계연보인데, 이 자료에 서 보면 조사항목에서 다소 상이한 점이 존재한 다. 먼저 1911년부터 1933년까지는 각 시도별 출 어선수, 승조인원, 어획고를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1934년에서 1942년까지는 각 시도별 어 획량과 어획고 및 어종을 중심으로 정리가 되어 있다. 따라서 표와 그림의 작성에는 자료정리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위해서 어획고만을 중심으 로 요약하였다.
Source : Analyzed and Revised based on Statistical Yearbook of the Japanese Residency-General(1911-1942) & Korean Statistical Information Service(2015)
Fig. 1. Trends of Annual Amount of Fisheries Catches.
Table 1. Annual Amount of Fisheries Catches of Domestic & Gyeongnam(1,000 Won(圓))
source : Analyzed and Revised based on Statistical Yearbook of the Japanese
Residency-General(1911-1942) & Korean Statistical Information Service(2015)
Table 1은 일제강점기 전국의 수산물 어획고 와 경상남도의 어획고 그리고 전국대비 경남이 차지하는 어획고의 비율을 나타내고 있는데, 1911년에는 전체의 절반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가 이후 1926년까지는 30%대로 떨어졌으며 1927년 이후부터 1934년까지는 20%대로 그리 고 1935년 이후에는 10%대로 그 비중이 점점 감 소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Fig. 1은 이러한 추세의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
한편, 이러한 원인에 대해서는 추후 연구가 더 이루어져야 할 부분이나 전국적인 어획고의 증 가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어업인의 어장진출, 어 업이주 등과 같은 어업침탈 정책의 직접 혹은 간 접적인 영향을 하나의 원인으로 추정할 수 있으 며 이러한 변화에 따른 당시 일본의 선진어업기 술의 도입에 의한 전반적인 어획고의 증가를 하 나의 원인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근거로는 경남의 어획고 비율의 감소에 대한 1920년에서 1930년까지 언론매체에 보도된 기사를 보면 흉 어(凶漁)에 대한 내용이 상당수 있는 데, 이러한 원인을 일제강점기 당시의 경남에서 빈번하게 발생한 흉어(凶漁)를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언급 하고 있는 기사(Dong-A Ilbo, 1922.12.08.; 1935.10.18.)와 남해 주요 어장에서 발생한 일본 특정 기업들의 급격한 어획고 증가와 매출 증가 (Kim, 2007)로 인한 어족자원의 심각한 타격 그 리고 대구불법조업과 어업자원보존에 대한 대안 개발을 위한 노력에 대한 기사(Chosun Ilbo, 1932.02.14.)와 일본재벌의 진해만 독점과 대량 어획에 대한 일반어민의 피해를 지적한 내용 (Dong-A Ilbo, 1922.10.03.)을볼때 간접적으로 나마 원인으로 제시할 수 있다.
2. 수산물 일본 수출현황
일제강점기의 어업 및 수산과 관련한 방대한 신문기사들 중에서 대(對)일본 수출에 대한 구 체적인 기사는 상당히 적은 편인데, 동아일보 (Dong-A Ilbo, 1926.09.03.)의 기사를 보면 1924 년과 1925년에 대한 세부적인 수출 통계자료가 언급되고 있다. 선어의 경우를 살펴보면, 1924년 에는 약 42만톤을 수출하였고 금액으로는 약 1,020만원의 수출액으로 기사에서 설명하고 있 다. 또한 1925년에는 수출물량이 60%정도 감소 한 약 25만톤을 수출하였으며 수출금액으로는 680만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선어를 제외한 품목에 대한 내용도 이 기사에 서 언급이 되고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의 Table 2와 같다. 세부적으로 수출품의 내용을 살 펴보면 선어 수출의 물량이 압도적으로 많은 비 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마른멸치(乾鰮), 해태(海 苔), 염어(鹽魚), 마른대구(乾鱈), 건패(乾貝), 건 하(乾鰕), 해삼(海蔘), 명태(明太魚), 까나리(玉 筋魚) 등이 주요 품목으로 나와 있다. 표에서 산 출된 수치는 당시 대한제국 교역국 전체를 대상 으로 한 통계자료로 일본수출이 대부분을 차지 하고는 있지만 중국, 러시아 등 다른 지역으로 수출도 포함되어 있다.
Table 2. Fisheries Export Summary of 1924 & 1925
표에서 보면 건제품이나 가공품의 경우에는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마른김 (海苔)과 마른멸치(乾鰮)로 나타나 있다. 이 두 품종은 현재가치로 환산하면 쌀(Rice) 가격을 기 준으로 했을 때 약 190억원, 생산자물가지수(PI: Producer price Index)를 기준으로 했을 때 70억원 에 해당한다(Bank of Korea, 2015). 한편 일부 자 료의 누락이 있기는 하지만 조선총독부 관보에 기록된 일제강점기 수산물 수출에 대한 내용을 참고로 일본으로 수출된 수산관련 품목들을 중 심으로 요약하면 다음의 Table 3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Table 3. Annual Summary of Fisheries Export to Japan(1,000won(圓))
Source: Analyzed and Revised based on Statistical Yearbook of the Japanese Residency-General(1911-1943) & Korean Statistical Information Service(2015); -: N/A
표에서는 일부항목들이 누락된 것이 있는데,통계연보 자체에 누락된 것도 있고 1927년부터 통계자료의 수집과 분석방법의 변화에 의한 부 분도 반영되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예를 들어 우뭇가사리(天草)나 말린새우(乾鰕)의 경우에 는 해조류 혹은 건어(乾魚)에 포함되어 조사되 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표와 그림에서 보면 1918년부터 일본수출의 물량이 선어의 경우 전년대비 10배 이상 증가한 것을 비롯하여 건어, 염어 등 대부분의 품목이 상당히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일부 통계자료가 누락된 부분을 제외하고 볼 때, 1940 년을 전후하여 일본수출의 증가가 현저하게 나 타나고 있고, 특히 마른김과 선어의 경우에는 상 당한 증가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수치가 정확한 통계적 과정을 통해서 조사된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일본으로 수출되 는 수산품 급증의 원인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연 구가 필요하겠지만 1918년 경의 증가는 카시이 겐타로(香椎源太郞)를 위시한 일본 어업자본 세 력이 급격하게 성장한 것을 하나의 이유로 추정 할 수 있다. 이러한 추정의 근거로는 1918년 카 시이가 조선수산수출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수산수출에 대한 사업을 시작(Lee, 2015) 하였다는 것을 제시할 수 있다. 또한 1940년 즈 음의 현상은 당시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군용 수요와 일본 자국 내의 식량을 충족하기 위하여 상당한 양의 수출이 발생한 것(Johnston, 1953)으 로 추정된다.
Ⅲ. 일제강점기 통영지역의 수산관련 주요 현황
1. 수산 및 어업 생산의 전반적 동향
1) 통영지역 어업·수산업의 입지와 현황
일제강점기 통영지역에서 어업 및 수산업과 관련된 가장 큰 이슈는 대구정치망과 관련된 어 업조합에 대한 것을 꼽을 수 있는데, 경남지역에 서 가장 큰 어장과 어획고를 기록하고 있던 통영 인근 지역에서 발생한 이러한 문제는 우리나라 어업에 대한 일본제국주의의 침탈과 수탈을 단 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연구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논지는 기존의 선 행연구들(Choi, 1980, 1981; Kim & Choi, 2013, Lee, 2015)에서 어느 정도 깊이 있게 논의가 되 었기에 세부적인 분석의 대상에서는 제외하도 록 하였는데, 간략하게 요약을 한다면 조선말과 대한제국 그리고 일제강점기 당시의 통영지역 어장은 생계를 전담하는 터전이자 경남지역 최 고의 어장임과 동시에 이러한 이권을 노리는 일 본제국주의와 그 산하 자본가들의 약탈대상이 된 어업의 핵심적인 지역으로 그 소유권 혹은 어 업권의 관계가 상당히 복잡한 상태(Lee, 2015)라 고할수 있다.
앞서 Table 1의 당시 어획고를 분석한 결과에 서 1911년 55%부터 1942년 17%로 경남지역의 어획고가 전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전반적으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러한 경남지역의 어 획고 중 통영지역의 비중을 지역이 아닌 개별 도 시별로 통계자료를 비교하는 것이 사실상 어려 워 관련기사를 토대로 간접적으로 추론하였다. 먼저 수산물 생산과 어획량에 있어서는 경남지 역의 1/3 정도를 차지(Chosun Ilbo, 1924.08.31.; Dong-A Ilbo, 1928.09.25.)하고 있으며, 1920년대 에 평균적으로 1,000만원 이상의 연간생산액을 기 록 하 는 어 장 의 중 심 지 (Maeil Sinbo, 1922.01.16.)로 설명되고 있다. 또한 1930년대에 는 이러한 연간산액이 2배 이상 증가하여 2,000 만원 정도에 이르고 있는 것(Dong-A Ilbo, 1931.03.24.; 1933.10.03.)으로 언급되고 있다.
한국수산지(Lee et al., 2010)에 기록된 1908년 (隆熙 2년, 메이지 41년)의 대한제국 어획고는 600만원에서 700만원 수준으로 나타나 있는데, 약 10년이 지난 후인 1920년 초기에 통영에서만 1,000만이 넘는 어획고를 기록하고 있는 것 (Maeil Sinbo, 1922.01.16.)으로 나타나 수산분야 에 있어서 상당한 기술적인 발전이 있었다는 점 과 일본제국주의의 어업과 수산업에 대한 식민 지정책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이러한 통영지역의 수산생산물 중에서 포(脯)나 앵간(櫻干) 등의 수산제조물이 1/3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Dong-A Ilbo, 1922.05.08., 1928.09.25.; Chosun Ilbo, 1924.10.14.) 으로 나타나있는데, 대부분 일본으로 수출되는 품종이었으며 선어의 경우에는 양륙(揚陸)되어 현재의 서울인 경성이나 개성으로 판매되었고 일본으로 수출되는 선어의 경우에는 양륙의 과 정을 거치지 않고 상당부분이 해상에서 바로 일 본의 시모노세키(下關) 등으로 바로 수출(DongA Ilbo, 1931.03.24.)되는 경우가 많아서 사실상 관련 통계자료에 포함되지 않은 부분까지 합하 면 5,000만원 이상으로 추정(Dong-A Ilbo, 1933.10.03.)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2) 통영지역의 어업·수산업과 인구통계분석
통영지역의 인구통계조사자료 중에서 일부이 기는 하지만 당시 신문기사에 언급된 내용을 살 펴보면 먼저 1933년의 경우 통영의 인구는 16만 명을 넘는 것으로 조사(Dong-A Ilbo, 1933.04.22.) 되었으며 이 중에서 약 3.5% 정도가 일본인으로 언급되고 있다. 한편 1935년의 자료(Chosun, 1934.06.19.)에서 보면 전년대비 약 1.7% 증가한 16만 6,000여명으로 조사되어 있다. 전체의 인구 중 직업이 어업인 사람은 16,885명으로 소개되 고 있는데 농업 인구가 많은 편이기는 하나 상대 적으로 어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상당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인 1933년 당시의 경상남도 전체 어업인구는 42,833명(Korean Statistical Information Service, 2015)으로 이러한 수치가 정 확하다면, 경상남도 어업인구의 약 40% 정도가 통영에 거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통영지역이 당시 상당한 어업 및 수산업의 중심 지였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Table 4에 이러한 내용들이 요약되어 나타나 있지만 어업 인구 외에 상업과 공업(제조업)의 인구도 상당 하다는 점은 당시 통영지역의 주요 수산가공품 산업의 입지를 설명하는 단적인 자료이며, 또한 무직의 비율이 전체의 0.3%라는 점도 당시 통영 의 경제상황이 상당한 호황이었으며 활발한 경 제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자료 라고 할 것이다.
Table 4. Demographics of Tongyeong in 1933&1934
Source : Dong-A Ilbo, 1933.04.22.; Chosun Ilbo, 1934.06.19.
2. 주요 어종별 전반적 어획 현황
통영지역의 주요 어종별 어획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1924년과 1934년의 자료(Chosun Ilbo, 1924.10.14.; 1934.06.19.)에서 보면 수산업 분야에서 주요 어획물과 금액이 기사에 나타나 있는데 일부는 판독하기가 어렵지만 식별 가능 한 내용을 중심으로 그 어획고와 현재가치로 정리하면 Table 5와 같다.
Table 5. Major Fisheries Catches of 1923 & 1933 in Tongyeong (measure: Won)
Source : Chosun Ilbo, 1924.10.14.; 1934.06.19.
표에서 알 수 있듯이 통영지역의 어획의 주종 은 멸치, 대구, 고등어, 전갱이 등으로 나타나 있 으며 일부 누락된 어종의 어획고를 제외하더라 도 전반적으로 10년간의 어획고가 상당히 감소 하였다. 멸치의 경우 약 65.0% 감소한 것을 비롯 하여 대구 40.3%, 고등어 31.1%, 조기 32.9%, 삼 치 53.5%, 갈치 49.4%로 평균적으로 45%이상 10 년 전에 비해서 어획고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나 있다.
한편, 이러한 통영지역의 어획에 대한 변화추 세를 분석하기 위하여 1921년부터 1939년까지 신문기사와 같은 언론매체에서 언급되고 있는 주요 어종에 대한 어획고의 풍흉과 관련된 기사 들을 조사하였다. 일부 연도에는 관련 기사가 존 재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고 몇몇의 경우에는 일시적인 어획고의 증감에 대한 내용만을 언급하 고 있는 기사도 존재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수집 된 자료들을 정리하여 요약하면 다음의 Table 6 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Table 6. Summary of Annual Catches Status of Tongyeong
(△:Good(豐漁), ▼:Bad(凶漁))
Source : C(Chosun Ilbo), D(Dong-A Ilbo), M(Maeil Sinbo) / YYYYMMDD
먼저 표에서는 통영의 대표적 어종으로 6개를 분석하였는데, 일제강점기의 신문에 표기된 어 종에 대한 표기는 다소 불명확한 점이 상당수 있 다는 점을 전제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밝 혀둔다. 대표적으로 남해안 지역에서 멸치로 통 용되는 온어(鰮魚)는 정어리와 멸치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고 사용되고 있었는데, 현재의 북한 지방의 해역과 동해지역 해역에서 어획되는 경 우에는 정어리로 대부분 사용(Dong-A Ilbo, 1926.06.24.; 1936.02.15.; 1939.06.17.)되고 있었 으며 통영·마산·진해만 등 남해에서는 멸치 로 대부분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표기 구분의 통일성과 명확성을 유지하 기 위하여 일제강점기의 주요 수산관련 상황을 다루고 있는 한국수산지(Lee et al., 2010)에서 사 용되는 어류표기를 참고하여 분석하였다.
세부적으로 주요 어획어종을 중심으로 살펴 보면, 먼저 대구(鱈魚)의 경우 일제강점기의 분 석기간인 1921년부터 1938년까지 1937년 2월 즈 음을 제외하고 거의 20년 동안 계속해서 어획이 감소하거나 흉어를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 나고 있다. 1920년대 초기 어획고를 현재 가치로 추정했을 때, 약 300억에서 900억 정도인 거의 1,000만원(圓) 이르고 있지만 1930년대로 들어 서면서 대구의 어획고는 당시 금액으로 300만원 정도에 그치고 있는 것으로 조사(Chosun Ilbo, 1934.06.19.)되었다. 이러한 어획고 감소의 직접 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자료의 수집과 분석이 필요한 부분이지만, 앞서 언급하였듯이 통영을 비롯한 경남지역의 조류와 기온 등의 자 연적 요건의 변화와 남해지역의 주요 어장에서 일본 어업인과 당시 우리나라 어업인들이 대구 어장에 지나치게 집중하였고 또한 대구 어업권 의 권리에 대한 분쟁(Lee, 2015)으로 어업권 관리 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다소 과도한 어획과 불법적인 어업이 만연하였다는 점과 어획과 병 행해야하는 어족자원 관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을 대표적인 원인으로 추론할 수 있다.
Fig. 3은 1921년부터 1939년까지 통영지역 해 당어업의 풍흉에 대한 기사들을 중심으로 어획 의 추세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언급되지 않은 부분은 평균적인 어획량을 기록하였을 것으로 가정하여 분석하였다. 앞서 언급한 대구의 경우 에는 전 시기에 걸쳐서 흉작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고, 멸치(鰮魚)의 경우에는 통영에서 어획되 는 대표적인 어종으로 이후 추가적인 조사가 필 요하겠지만 그림에서 보면 3-4년을 주기로 풍 흉을 반복하고 있는 추세를 나타내고 있다.
Source : Revised and analyzed based on Table 6.
Fig. 3. Major Fisheries Catches Trend of Tongyeong
전갱이(鰺魚)의 경우에도 멸치와 유사한 형태 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림에 나타나 있으며 1928년과 1930년 사이에 상당한 어획을 기록하 다가 이후 감소 혹은 평균적인 어획고를 올리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고등어(鯖魚)의 경우 에는 우리 민족이 상당히 선호하고 그 소비가 많 은 대표적인 어종인데, 해당기간 동안 풍흉에 대 한 기사가 1928년과 1936년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나 꾸준한 어획을 올렸던 것으 로 추정된다.
한편, 정어리(鰯魚)의 경우에는 다소 특이한 점이 있는데, 1930년대 초반까지는 어획이나 판 매에 대한 기사가 거의 없다가 1930년대 후반에 현재가치로 약 8억원 이상인 당시 금액으로 100 만원(圓)의 수확이 몇 년간 있었다고 언급 (Dong-A Ilbo, 1936.07.28.)되고 있다. 정어리의 경우 2차 세계대전을 즈음해서는 일본으로 착취 해가는 대표적인 식량으로 1931년에서 1938년 까지 연간 150만톤 이상 반출 혹은 수출되었으 며 이는 일본내소비량의 42%를 차지하는 막대 한 규모였다(Johnston, 1953). 이러한 현상을 반 영하듯이 통영의 일부 영세어민들은 청진까지 가서 정어리 조업을 한 경우(Dong-A Ilbo, 1938.07.13.)도 있었다고 한다. 갈치(大刀魚)의 경우에는 신문기사에서 거의 언급이 되고 있지 않고 있어서 전반적으로 양호한 어획고를 올렸 을 것으로 추정한다.
3. 어업조합관련 현황
현재 우리나라 최초의 어업조합으로 간주되 는 거제한산가조어기조합(巨濟閑山加助漁基組 合)과 거제한산모곽전조합(巨濟閑山毛藿田組 合)이 통영인근 지역임을 감안한다면 당시 지역의 어업조합에 대한 논의가 상당한 의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러한 당시 조합에 대 한 연구는 일부의 연구(Kim & Choi, 2013; Lee, 2015)를 제외하고는 연구관련 자료수집의 태생 적 어려움으로 상당히 부진한 실정이다. 연구에 서도 언론매체에서 다루어진 기사들을 수집하 였으나 조합과 관련된 직접적인 기사는 거의 찾 기가 어려웠다.
Table 7은 1934년의 통영지역 어업조합과 관련된 기사를 요약, 정리한 것으로 연간예산액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표에서 보면 당시 통 영인근 지역의 어업조합과 한해 예산금액으로 거제어업조합 100,383원, 한산면어업조합 19,768원, 산양면어업조합 35,160원, 사량도어업 조합 31,532원, 욕지어업조합 40,476원, 가조도 어업조합 6,063원, 장승포어업조합 22,455원, 남 포어업조합 51,662원, 광도온망어업조합 98,802 원으로 나타나 있으며, 전체 어업조합의 예산액 합은 40만원 정도로 현재가치로 환산하면 생산 자물가지수 기준으로는 약 18억, 쌀가격 기준으 로는 약 47억 정도의 수준으로 언급되고 있다.
Table 7. Budget of Fishermen’s Association in 1934 (won(圓))
Source : Chosun Ilbo, 1934.06.19.
단순하게 이러한 예산금액을 기준으로 직관 적인 비교는 어렵겠지만, 1933년 영일어업조합 의 계 획 예 산 이 269,309원 (Dong-A Ilbo, 1933.04.01.)으로 되어 있고, 1935년 강릉연해수 산의 계획예산이 28,000여원으로 기록(Dong-A Ilbo, 1935.03.20.)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해 본다 면 당시 통영지역의 어업조합의 규모는 상당히 큰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로 영일어업조합의 경 우, 1914년 12월 8일에 설립되었으며 당시 우리 나라 청어 생산량의 70%가 어획되었던 것으로 상당히 큰 규모의 어업조합(Kyongbuk Ilbo, 2014.12.09.)이었으며, 강릉연해수산은 인근 군 내의 생산량의 40%를 점유하는 중간 정도 규모 의 어업조합으로 나타나 있다.
한편, 이러한 어업조합의 상황과는 다소 대조 적으로 당시 대표적인 수산유통기관이라 할 수 있는 통영어시장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미미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한국수산지(Lee et al., 2010) 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통영어시장의 경우, 일본 인 33인과 한국인(당시 조선인) 2인의 조합인 통 영어시장 조합이 1907년(메이지 40년) 4월 1일 에 설립하여 경영하였으며, 자본금은 5,000원으 로 다른 지역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영세한 규모 로 운영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34년의 기사 (Dong-A Ilbo, 1934.10.16.)에서도 통영지역의 어 획고 중에서 약 14%정도가 어시장을 통해서 유통되고 있다고 설명되고 있다.
이러한 당시 수산유통기관에 대한 역할에 대 한 부분도 향후 추가적으로 연구가 되어야 할 부 분이다. 한편, 앞서 언급한 카시이(香椎)가 주도 적으로 경영한 부산수산회사의 통영지점의 존 재하였고, 이 회사의 매출이 연간 30만원을 넘는 것으로 기록(Maeil Sinbo, 1935.10.13.)되어 있다 는 점과 통영조합어시장에서 통영지역으로 유 통되는 경우가 거의 없으며 어류 수용장(收容場) 의 역할만을 하고 있다는 한국수산지의 기록 (Lee et al., 2010)을 참고한다면 통영지역의 일제 강점기 당시의 유통구조는 크게 일본인이 직접 경영하는 수산회사를 통한 유통, 일부 전통적인 객주나 지역 상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유통, 해상 에서 양륙하지 않고 부산이나 마산과 같은 지역 으로 운반되거나 매매되는 방식의 유통의 형태 로 운영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1914년 조선총독부령 제136호에 의거하 여 객주상 및 회사경영 시장의 개설을 금지하고, 수산물 유통에 대한 통제체제를 더욱 강화하여 특정 구역만을 수산물 판매장으로 하는, 소위 의 무상장제를 실시하였다(National Archives of Korea, 2015b)는 점에서 일본자본의 수산유통 독 점화와 선상에서 바로 유통시키거나 비공식적 인 경로의 비율이 상당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4. 통영수산품평회
일제강점기에 개최된 대부분의 수산품평회는 지역의 어업과 수산업의 실적을 홍보하고 수산 개발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수산과 관련된 다양 한 생산물, 가공품, 제품 등을 대상으로 지역에 서 개최된 행사(Kim, 2007)이다. 총독부관보에 근거하면 최초의 품평회는 Fig. 4에 나타나 있듯 이 1913년 강원도지역에서 개최가 공시된‘강 원도 연안 영동 8개군 연합 수산품평회’로 추정 된다(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015). 이후 강원도 지역에서는 다음 해인 19014년에 다시‘강원도 영동 6개군 연합 수산품평회’라는 명칭으로 개최가 공시된 기록(National Archives of Korea, 2015a)이 있다.
source : The Japanese Residency-General Documents(1913.09.08.),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2015)
Fig. 4. The First Official Notice for Fisheries Exhibition.
이후 이러한 품평회는 1921년 강원수산품평 회, 1922년 원산수산품평회, 함남수산품평회, 통 영수산품평회 등 다양한 지역에서 개최가 되었 다(Lee, 2010). 그러나 이러한 품평회는 이후 수 산공진회라는 일제의 어업수탈정책의 수립과 시행을 위한 하나의 디딤돌로써의 성격(Kim, 2007)이 강했고, 일본제국주의 총독부의 주도로 이루어진 관영(官營)행사의 성격이 상당히 강했 던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이러한 수산품평회 중에서 당시 언론매 체에 가장 많이 언급되고 당시 식민지 조선인의 참여가 상당히 높아서 성공적인 행사로 평가되 는 것이‘통영수산품평회’이다. Kim(2007)과 Lee(2010)의 연구에서도 이에 대한 언급이 있지 만, 본 연구에서는 당시 언론매체의 기사들 (Dong-A Ilbo, 1922.09.22.; 1922.10.16.; 1922.10.25.; 1922.10.27.; Maeil Sinbo, 1922.10.16.)을 중심 으로 개괄적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통영수산품평회는 1922년 10월 21일부터 30 일까지 개최되었으며, 개최당일과 그 다음날에 1만명 이상이 참관한 당시로는 지역의 대규모의 행사였다. Fig. 5는 당시 행사에 대한 내용을 다 루고 있는 기사인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전 체 행사는 두 군데의 장소에서 병행하여 진행이 되었는데, 제1회장은 5,000〜7,000평의 규모로 통영신축어시장(吉野町)에서 1,884점의 각종 수 산관련 제품들이 전시되었다. 제2회장은 현재의 경상대학교 해양과학대학부지(曙町)에서 수산 회, 포경회사 등에서 출품한 참고품, 어획 보고 서, 사진 및 통계자료와 같은 교육적 자료들을 전시하였다. 행사는 수산품의 전시와 함께 낚시 대회, 영화상영, 백일장과 같은 다양한 문화행사 도 병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행사를 위해 서 민관이 모두 동원되어 협찬회를 조직하고 총경비 15,000원 가량을 예산으로 개최되었다.
Source : Dong-A Ilbo, 1922.10.25.
Fig. 5. Fisheries Exhibition in Tongyeong.
한편, 선행연구(Lee, 2010)에서는 통영수산품 평회에 대해서 수산업적 의의를 당시 통영의 수 산업 종사자 중에서 다수를 일본인이 차지하고 있었고, 수산관련 고등교육기관인 수산전습소 (현 경상대학교 해양과학대학)의 설립을 배경으 로 일본의 수산업 위세를 알리기 위한 행사의 성 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과 멸치로 대표되는 통 영어업의 위상을 대내외적으로 알리기에 적절 한 것이었다고 논증하고 있다.
특히 이 행사는 바로 다음해인 1923년 부산에 서 개최되는 조선수산공진회의 사전행사적인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배 하 수산업을 보다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수 단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러 한 것은 동아일보의 기사에서 선진 수산 기술을 가진 일본의 대한제국 침탈에 대한 자괴적인 논 조가 언급되고 있으며, 주체적인 수산분야의 투자와 수산업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는 점 (Dong-A Ilbo, 1922.10.25.)을 참고할 수 있겠다.
한편, 통영수산품평회가 가지는 긍정적인 차 원에서의 의미로는 다른 수산품평회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한국인(당시 조선인)의 참여가 월등 하게 높은 행사였고, 단순한 수산관련 제품의 홍 보와 판매에 그치지 않고 수산교육과 관련된 행 사를 병행하였다는 점이 가장 주목해야 할 것으 로 판단된다. 특히 수산전습소에서 행사를 개최 하여 수산관련 교육과 관련 자료들을 대내외적 으로 홍보함으로써 당시 고등수산교육의 정책 적 의지를 강하게 표출한 행사라는 점을 언급할 수 있다.
Ⅳ. 결론 및 제언
어업과 수산업에 대한 다양한 연구들이 지금 까지 다양한 주제와 이슈에 대해서 이루어져 왔지만, 수산업의 역사적 관점에서의 접근 특히 일 제강점기의 어업과 수산업에 대한 연구는 일부 주제에 대해서 한정적으로 수행이 되어 왔다. 연 구에서는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일제강점기하 대한제국의 어업과 수산업에 대한 전반적인 동 향을 살펴보고, 당시 수산업의 거점기지라 할 수 있는 통영지역과 관련된 이슈와 현황들에 대해 서 조사하였다.
연구를 통해서 일제강점기하의 어업과 수산 업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 다. 첫째, 일본제국주의의 침탈과 약탈로 인한 당시 대한제국의 어업이나 수산업의 상황은 상 당히 열악하였고, 일본어업인 중심의 대규모 자 본에 의한 어업침탈이 상당하였다는 것이다. 특 히 경남의 경우에는 일본 선진기술을 앞세운 대 규모 어업자본가들의 진출과 이에 편승한 어업 자원의 과도한 어획으로 상당한 피해가 있었다 는 점이다. 또한 일본으로 수출되는 수산물의 경 우에는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일부품목에 국한 된 양상을 보이다가, 일본자본가들의 본격적인 진출시점인 1920년대에는 대부분의 품목에 걸 쳐서 증가추세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즈음에는 일본으로 수출되 는 수산물의 양은 엄청나게 폭증하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으로 일제강점기의 통영 수산업은 상당 한 수준이었으며, 특히 경남지역 어획고의 1/3 이상, 어업인의 40% 이상이 거주하는 수산업의 중심지로 그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한편, 어종 별 어획고에서는 당시 주력어종이었던 대구는 일제강점기 동안 어장관리와 소유권 분쟁, 자연 적인 환경의 변화, 선진어업기술을 통한 무차별 적인 많은 어획 등의 이유로 어획이 지속적으로 좋지 않았으며, 멸치의 경우에는 3-4년을 주기 로 풍흉을 반복하는 추세를 나타내고 있었던 것 으로 조사되었다. 이와 함께 당시 통영의 어업조 합의 규모는 다른 지역에 비해서도 월등히 규모 가 큰 편에 속하였으나 자체적인 유통기구의 운영이나 민족자본 중심의 수산유통기관의 존재 는 상대적으로 미약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마지막으로 일제강점기에 통영에서 개최된 통영수산품평회는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적 의도 로 개최되었던 것이었지만 당시 다른 품평회에 비해서 한국인(조선인)의 참여가 상대적으로 높 았으며 그 주최와 운영에 있어서도 다수가 한국 인(조선인)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또한 수산품의 전시와 함께 수산관련 교육과 관련된 행사가 병행되었다는 점도 수산업사(水産業史)에서 상당한 의미를 가 진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본 연구가 가지는 한계점으로는 앞에서 도 언급하였지만, 본 연구와 같은 역사적 관점에 서의 연구들이 가지는 태생적인 자료의 양적인 한계, 구체적인 근거 자료의 접근성 문제와 같은 것을 들 수 있으며, 당시 언론매체의 완벽한 객 관성 검증을 위한 교차확인과 같은 부분도 향후 보완되어야 할 사항이다. 이와 함께 일제강점기 의 일본에서 만들어진 다양한 자료들을 추가적 으로 분석에 포함하지 못한 것도 다소 부족한 부 분으로 지적할 수 있으며, 일제강점기의 시기별 로 해당 자료를 분석하고, 대한제국 전체와 경남 지역에 대한 보다 세밀한 분석과 연구가 충분히 논의되지 않아 향후 이에 대한 보완 연구가 이루 어져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는 이전의 연구들에서 거 의 논의되지 않았던 일제강점기의 수산 동향에 대해서 살펴보고, 당시 수산업의 대표적인 지역 인 통영을 중심으로 한 주요 이슈들에 대해서 논 의를 하였다. 향후 연구에서는 이러한 주요 어업 거점지역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추가적인 연구 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당시의 주요한 다른 이슈들을 찾아내고 그에 대한 연구 또한 지속적 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더불어 이를 위해 학계와 산업계 그리고 관련 연구 인력에 대한 확 보와 참여와 관심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Figure
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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