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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 1225-1011(Print)
ISSN : 2288-1727(Online)
The Journal of Fisheries Business Administration Vol.51 No.2 pp.25-50
DOI : https://doi.org/10.12939/FBA.2020.51.2.025

On the Background and the Process of ‘Japan Fisheries’ Compilation

Kyung-Soon Seo*
*Senior Researcher, Tsushima Research Center, Pukyong National University, Busan, 48513, Korea
*Corresponding author : https://orcid.org/0000-0003-2022-8822, +82-51-271-2857, E-mail : seoks0709@hanmail.net
20 April 2020 04 June 2020 05 June 2020

Abstract

The aim of this study is to overview what changes happened on the maritime field during the early Meiji period, how the compilation of ‘Japan Fisheries’ linked to the changes, and when the ‘Japan Fisheries’ was launched, completed and published. The trilogy of Japan Fishing Method, Japan Fishery Products, and Japan’s Useful Marine Products are called “Japan’s Fishery.” These were completed in 1895 for almost ten years since the compilation project was launched in 1886 at the Agricultural and Commercial Ministry. Japan Fishing Method selected, improved and recorded excellent fishing and fishing methods in various Japanese regions at that time whereas Japan Fisheries Products chose excellent fish products from various methods of manufacturing and recorded the enactment and sale of fishery products. Japan’s Useful Marine Products is not currently passed on, so it is not known what kind of useful marine products are recorded. However, it can be assumed that the classification method of the “Japanese Fishing Classification Table” published in 1889 was based on the Japan Fishing Index. The cited texts in Japan Fisheries Products are up to 55 documents, including Engisiki and Wakansanzaizukai’s “Report of the Great Japan Fishery Association,” “Ariticle of the Fisheries Fair,” “The Western Fishery Manufacturing Technique” and “Trade Situation with China.” Completed with extensive research from old books to the latest fishery information, “Japan’s Fishery” is Japan’s best “Marine Products Encyclopedia” at the time. It is also a valuable literature that can trace fishing and fishing techniques and methods of manufacturing marine products in each Japanese fishing village before the end of the nineteenth century.

‘일본수산지’의 편찬 배경과 과정에 대하여

서경순*
*부경대학교 대마도연구센터 책임연구원

초록


    Ⅰ. 서 론

     

    1868년 메이지 정부는 근대화를 목표로 모든 체제에 대한 개혁을 신속하게 추진하였다. 개혁의 단초는 무엇보다 이와쿠라사절단(岩倉使節團)1)의 구미파견을 들 수 있다. 정부 수뇌부를 비롯하여 107명으로 구성된 대규모의 사절단은 1년 10개월(1871. 12~1873. 10)에 걸쳐 구미의 12개국을 순회하였다. 처음 방문한 미국에서 분야별 조사팀을 구성하여 순회 국가의 정치ㆍ사회ㆍ교육ㆍ경제ㆍ법률ㆍ군사 체제 및 철도를 비롯한 선진 산업시설 등을 견학하였다. 귀국 후 이를 기초로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정부 수뇌부들이 중심이 되어 서구화 체제를 지향하였다2).

    근대는 수산물에 대한 유용성이 확인되면서 구미 각국에서는 수산만국박람회가 개최되는 등 수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메이지 정부도 서구화 정책에 따라 만국박람회에 참가하였고 수산분야에도 책임사무관 등이 파견되어, 물고기 인공부화법, 포경법, 編網機械·통조림 기계 등 수산에 관련된 구미의 최신 정보와 선진기계가 일본으로 도입되는 등 수산진흥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수산물은 메이지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주로 식용과 비료로 활용되었지만, 만국박람회를 통하여 수산물에 대한 활용 가치의 다양성 및 수산 수출품이 국가 재원의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일본 정부는 수산진흥을 목적으로 행정개편을 실시하여 농상무성 산하에 수산국을 두었으며, 이후 국내 수산박람회 개최, 수산 예찰조사 실시, 수산조사소 설치 및 수산조사위원회 운영 등 수산물 해외수출 극대화에 주력하였다. 민간에서도 일본 최초의 수산단체인 대일본수산회가 결성되었으며 또한 이 단체에서 주도하여 수산전습소(이후 수산강습소로 개편)가 설립되어 일본 최초의 ‘근대적인 수산전문교육’이 이루어졌다.

    한편으로는 당시 일본의 각 어장이 남획으로 인하여 고갈되어 감에 따라서 농상무성에서 ‘수산자원보전’을 중요 과제로 삼고 禁漁 혹은 산란 보호 등 ‘수산보호번식정책’을 실시하였다. 당시 번식이라는 것은 거액의 재정지출을 수반하는 인공적 시설 및 장치를 갖춘 양식이 아니고 자연 상태에서 수산 생물의 번식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즉 1890년대까지 비용이 많이 드는 수산 고도화 정책이 아니며, 돈 안들이고 최대의 권업적 효과를 기대한 ‘수산보호번식정책’이다3).

    이 정책은 농상무성의 주도하에 각 府縣으로 전달되어 실시하였으며, 수산자원보전을 통하여 전통적 생산기술(어업 및 수산제조법)의 재발견 및 재정립을 위하여 전국적인 검토가 실시되면서4) ‘일본수산지’라는 결과물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일본수산포채지(日本水産捕採誌)』ㆍ『일본수산제품지(日本水産製品誌)』ㆍ『일본유용수산지(日本有用水産誌)』 3부작을 ‘일본수산지’라고 하며5) 제일 먼저 간행된 것은 『日本水産捕採誌』이다. “수산관계자들의 필수서적으로 간행을 요구하는 사람이 많아서 간행하게 되었다”6)고 밝힌 수산국장 도케 히토시(道家 齊)의 언급을 통해서도 ‘일본수산지’는 당시 으뜸가는 ‘수산실무서적’으로 각광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일본수산사’ 분야에서 ‘일본수산지’ 3부작에 대한 성립 과정 및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다룬 연구는 없다. 본고에서는 농상무성에서 실시했던 ‘해외무역극대화사업’과 ‘수산보호번식정책’ 속에서 이루어진 ‘일본수산지’ 편찬 사업 등 수산정책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1) 岩倉使節團은 특명전권대사 岩倉具視 및 木戸孝允(桂小五郎)ㆍ大久保利通ㆍ伊藤博文ㆍ山口尚芳의 副使 4명의 정 치수뇌부를 비롯하여 공무원 및 유학생 등 총 107명으로 구성되어 1881년 12월 23일부터 1873년 10월 13일까지 약 1년 10개월에 걸쳐 미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국가에 파견된 사절단이며, 파견목적은 불평등 조약 개정 협상과 구미 선진국의 견학 및 우호친선이었다.
    2) 田中彰,『明治維新と西洋文明』, 岩波新書, 2003, 6~7면. 3) 高橋美貴, 「近代前期における水産資源の「保護繁殖」政策」, 國立歷史民俗博物館硏究報告 第87集, 2001, 170~172 면, 180면. 당시 일본정부는 1877년 서남전쟁의 여파로 인하여 국가 재정위기에 있었다.
    4) 위의 논문, 169면.
    5) 『日本水産捕採誌』 서문의 凡例에는 “『日本水産捕採誌』는 『日本水産製品誌』와 『日本有用水産誌』와 함께 ‘일본수 산지’의 하나이다”라는 언급이 있다. 즉 ‘일본수산지’는 『日本水産捕採誌』ㆍ『日本水産製品誌』ㆍ『日本有用水産誌』 3부작을 말한다. 
    6) 農商務省 水産局,『日本水産捕採誌』, 水産書院, 1911, 序<수산국장 도케 히토시(道家 齊)의 서문>. 

     

     

    Ⅱ. ‘일본수산지’의 편찬 배경

     

    1. 수산행정기관의 설치

     

    일본은 바다로 둘러싸인 지형적인 특성으로 원시시대부터 수산물은 식용 또는 약용으로 많이 이용하였다.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도시로 집중되는 인구에 대한 수산물의 공급과 해외 수출을 위한 수산물의 관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일본에서 수산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기다. 1877년 內務省 勸農局에 水産系가 설치되면서 水産이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처음 사용되었고, 그 후 농무국 수산과(1881), 대일본수산회(1882), 수산박람회(1883), 수산전습소(1888) 등과 같이 점차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7). 이처럼 수산 관련 행정 조직이 설치되면서, 수산전문 교육기관의 설립, 국내 수산박람회의 개최, 수산 계몽을 위한 수산전문 관료의 지방순회파견 등 여러 분야에서 수산진흥사업을 추진하였다. 메이지 신정부가 수립된 이후 수산행정기관의 설치 및 개편사항은 <표 1>과 같다8).

     

     

     

     

    7) 松井 魁,『書誌学的水産学史並びに魚学史』, 鳥海書房, 1983, 3면; 黑田一紀ㆍ山川 卓, 「水産の語源と水産学のはじ まり」, 日本水産学会誌, 84(6), 2018, 700면.
    8) 大日本水産会,『大日本水産会百年史』前編, 1982, 42~43면; 片山房吉,『大日本水産史』, 有明書房, 1983, 56면, 78 면, 97~98면, 112면.
    9) 1874年 内務省에 설치된 勧業寮(殖産興業의 전담 부서)가 1877년 1월 勧農局이 되었고, 1881년 農商務省 수산국으 로 승격 되었다(フリー百科事典『Wikipedia』).

     

     

    수산 행정업무는 1880년부터 1885년 사이에 뚜렷한 변화를 보인다. 특히 1881년 식산흥업 전담 관청인 農商務省이 신설되면서 농무국에 수산과를 두었고, 1885년에는 농무국 수산과를 수산국으로 승격시켜 수산 업무 범위를 확대하였다. 오쿠 쇼우스케(奧 靑輔)10)가 초대 수산 국장으로 임명되고, 아래로 차장 소메가와 히토시(染川 濟) 그리고 技師 세키자와 아케키요(關澤明淸), 그 외에 사무원 및 기수 30여 명이 조직되었다. 수산국의 특별설치는 일본수산사에 중요한 意義가 있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11).

    수산국으로 승격되기 2년 전에 일어난 대외적인 상황을 살펴보면, 1883년 朝日通商章程이 체결되어 조선의 함경도ㆍ강원도ㆍ경상도ㆍ전라도 연해에서 일본 어부의 어로활동이 합법화되었다. 이후 1889년 韓日通漁章程을 비롯한 조일 간 장정(조약)이 계속 체결되어 조선 연해에 대한 일본 어부의 합법적 어업권이 확장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일본 어부의 출어를 본격화할 목적으로 1892년 세키자와 아케키요(關澤明淸) 조사단을 조선에 파견하여 최초 공식적인 조선 연해조사를 실시하여 1893년 ‘조선연안 정보지’라고 할 수 있는 『朝鮮通漁事情』을 간행하였다. 이어서 수산국의 기사(기수 포함)들의 조선연안조사는 계속 시행되어 다양한 ‘조선연해 조사보고서’가 나왔다13).

    일본정부가 일본 어부에 대한 ‘조선연해 출어장려’를 본격화한 것은 조일 간 체결된 장정(조약)으로 조선 어장에 대한 일본어부의 조업권을 합법화한 것이 계기가 되었지만, 이외에도 1890년 일본 정부가 재정곤란에 따른 긴축정책을 실시하게 된 점14)과 일본 연해가 남획 및 공업화의 가속 등으로 황폐화되면서 실업 어부가 급증하자 이에 대한 구제 방안을 수산자원이 풍부한 조선 연해에서 모색하고자 했던 것도 하나의 이유라고 할 수 있다15).

    1897년 6월 관제 개정(칙령 제183호)에 따라 수산국이 다시 부활하여 후지타 시로(藤田四郞)16)를 수산국장으로 임명하고 漁務課<과장 마츠자키 쥬조(松崎壽三)>와 水産課<과장 시모 게이스케(下啓助)17)> 2課가 설치되었다18).

    또한 내각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농상무성대신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에 의해 칙령 제49호가 발포된 후 고베에서 제2회 수산박람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박람회는 일본의 수산계 발달사에 한 획을 그을 정도로 큰 성과가 있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같은 해 3월에는 수산전습소가 폐지되고 이를 계승한 수산강습소가 설치되었다. 초대소장은 농상무성 수산국장인 후지타 시로가 겸임하였으며, 수산과장 시모 게이스케와 技師 마츠바라 신노스케가 감사를, 어무과장 마츠자키 쥬조가 교수로 각각 임명되어 수산국에서 수산강습소의 주요업무를 주관하였다20).

    이외에도 해외무역 극대화를 위하여 수산국의 기사(기수 포함)를 비롯한 고등 관료가 중국(淸國) 및 사할린 등 해외로 파견되어 수산조사를 실시하는 등 수산 조사 범위가 점점 확대되었다. 이와 같은 메이지 정부의 수산 관련 행정 조직이 바로 ‘일본수산지’의 편찬을 추진한 중심 기관이었고, 거기에 속한 인력들이 ‘일본수산지’ 편찬에 필요한 조사를 수행했던 수산 분야 전문가들이었다.

     

     

    10) 본고에 기록된 人名 가운데 한자의 음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인명은 편의상 『日本人名地名辭典』(P. G. O'Neill, John Weatherhill Inc. 1972)을 참조하였다.
    11) 片山房吉,『大日本水産史』, 有名書房, 1983, 177~178면. 12) 1893년 10월 간행된 『朝鮮通漁事情』(關澤明清ㆍ竹中邦香 공저)에는 1892년 11월~1893년 3월 초(약 100일)까지 조 선연해의 경상도ㆍ전라도ㆍ강원도ㆍ함경도ㆍ충청도ㆍ경기도의 어업상황 및 일본 어부의 조선연해 출가 인원수, 어선 수, 어획물의 종류 및 제조 그리고 판로에 대한 조사와 아울러 通漁規則을 비롯한 여러 규칙 등이 기록되어 있 다. 竹中邦香은 『日本水産捕採誌』의 편찬담당자 중 1인이다.
    13) 서경순ㆍ이근우,「한국수산지』의 내용과 특징」, 『인문사회과학연구』20-1, 2019, 128면.
    14) 大日本水産会,『大日本水産会百年史』前編, 1982, 42~43면.
    15) 서경순ㆍ이근우,「한국수산지』의 내용과 특징」, 『인문사회과학연구』20-1, 2019, 128면.
    16) 1885년 동경제국대학법학부 졸업 후 외무성 출사, 1892년 농상무성 참사관, 1893년 농무국장, 1895년 수산조사회 위원, 1897년 4대 수산국장 역임, 어업법 제정, 원양어업장려법 제정에 참여(大日本水産会,『大日本水産会百年史』 前編, 大日本水産会, 1982, 116면).
    17) 1895년 농상무성 어용계로 수산국 근무, 1898년 수산과장, 1911년 수산강습소 소장(1889년 수산전습소 창립위원), 저서 는『水産總覽』『露領漁業沿革史』『水産回顧錄』등이 있다(『大日本水産会百年史』(1982) 前編, 119면 인용).
    18) 片山房吉,『大日本水産史』, 有名書房, 1983, 112면, 183~184면.
    19) 片山房吉,『大日本水産史』, 有名書房, 1983, 501면.
    20) 片山房吉,『大日本水産史』, 有名書房, 1983, 708~709면.

     

     

    2. 만국박람회(萬國博覽會)의 참가

     

    메이지 정부는 1873년 개최된 오스트리아 빈 만국박람회 참가를 시작으로 유럽 각국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에 매회 참가하였으며, 수산분야에서도 출품과 함께 담당사무관 등이 파견되었다.

    빈 만국박람회에는 총재, 사노 쓰네타미21)를 비롯하여 다나카 요시오22)와 세키자와 아케키요23) 등이 수행원으로 파견되어 인공부화법을 비롯한 수산 견학과 함께 편망기계를 일본으로 들여와서 어망 대량생산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1876년 미국 합중국 건국 100주년 기념으로 개최된 필라델피아 만국박람회에도 다나카와 세키자와가 파견되었다. 세키자와는 연어 인공부화법과 연어ㆍ송어 통조림 제조에 관한 진공화 기술을 습득한 후 돌아와 송어 양식에 착수하였으며 인공부화사업의 진흥에 노력하였다24). 그리고 북해도에 통조림 시험장을 만들고 미국 기사를 초빙하여 기술을 습득하였다25).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 참가 후에는 통조림 기계를 일본으로 들여왔다. 처음에 지바현(千葉縣) 조시(銚子)에 설치하여 시험하였지만 별 성과를 보지 못하자 통조림기계는 수산전습소로 옮겨져 학습용이 되었다. 이후 통조림 제조 기술이 점점 향상되어 해외 수출용 및 군수용으로 보급되는 등 일본의 통조림 사업의 발달에 기여하게 되었다26).

    1879년 독일에서 개최된 수산박람회는 수산국 사무관으로 파견된 마츠바라 신노스케(松原新之助)와 독일 유학 중에 있던 무라타 다모츠(村田保)의 유명한 일화를 빼놓을 수 없다. 당시 독일 유학 중이던 무라타가 박람회를 관람한 후 마츠바라를 만나 일본은 수산물이 풍부한 국가인데도 구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박람회 출품 수가 너무 적고 수준도 매우 부진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호소하면서 이를 공감하고 있던 마츠바라와 서로 뜻이 통하여 장래 일본의 수산진흥을 위한 의견을 나누었다고 전해진다. 실제 두 사람은 귀국한 후에 ‘독일수산회’와 같은 대일본수산회라는 수산조직체를 결성하는데 적극적인 노력을 하는 등 일본 수산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27).

    무라타는 원래 수산 분야와 관련이 없는 메이지 정부의 새로운 법률 제정 분야에서 활약한 관료이자 정치가였다. 그런 그가 베를린에서 개최된 만국수산박람회를 계기로 수산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되면서, 수산 분야에서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1882년의 대일본수산회 설립에 노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1888년에는 어장 분쟁과 난획 문제에 대처하기 위하여 어업권 등을 규정한 어업법안을 제출하였고, 1889년에 수산전습소 소장에 취임하였으며, 1894년 청일전쟁 때는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통조림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통조림을 제조하여 군부에 보내기도 하였다. 1896년에는 일본 근해에 진출하는 외국 어선에 대항하기 위하여, 일본의 원양어업에 대하여 보조금을 요청하는 법안을 제출하였고, 또한 수산박람회 개최 안을 의회에서 제출하여 다음해 고베에서 제2회 수산박람회가 개최되었으며, 1897년에 원양어업장려법이 공포되었다. 1897년에는 지속적인 청원으로 수산국을 부활시켰다. 같은 해에 규모가 확대되어 재정이 부족하게 된 수산전습소를 관립기관으로 만들 것을 의회에 건의하여 관설 수산강습소가 설치되었다. 이처럼 무라타와 같은 법률 분야 관료가 수산 분야에 주목하면서, 대일본수산회의 결성, 수산 관련 법률의 제정, 수산전습소의 관영화 등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그가 추진한 수산박람회 역시 ‘일본수산지’ 편찬의 중요한 연원이었다.

     

     

    21) 佐野常民(사노 쓰네타미, 1823-1902), 정치가, 일본 적십자사 창시자(1877년 博愛社를 설립하여 1887년 일본 적십자 사로 개칭), 추밀고문관, 농상무대신, 대장경, 원로원의장 역임. 1873년 오스트리아 빈 만국박람회에 참가한 것이 계 기로 일본 근대화에 공헌하여 “博覧會男(박람회 남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22) 田中芳男(1838-1916), 박물학자, 물산학자, 농학자, 원예학자, 男爵, 信濃國下伊那郡飯田中荒町(現,長野縣)에서 출 생, 메이지시대 上野公園을 설계(2대 박물관장 역임)하였고, 동물원, 식물원 구상하였다. 일본 박물학의 개척자이며, 「博物館」이란 명칭을 만들었다.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 1873년 빈 만국박람회 등에 참가하였다. 元老院議官, 貴族院議員, 대일본산림회회장, 일본원예회 부회장 역임 등 일본 식산흥업 지도 및 기초 박물학 보급에 주력하였다. ‘일본수산지’ 3부작(1886~1895)의 총괄책임을 맡았던 인물이다.
    23) 關澤明清(1843-1897)는 幕末~明治期 近代水産 선구자 및 지도자, 加賀金澤藩 출신, 蘭学을 배웠고, 藩命으로 英国 留学, 귀국 후 메이지 정부의 水産官僚(水産技師)가 되었다. 農商務省 技師, 日本에서 최초 송어 人工孵化에 성공, 미국식 巾着網에 의한 정어리(멸치) 어획법, 미국식 近代捕鯨法 시도, 駒場農学校長, 初代水産傳習所長, 東京農林 學校教授 등 역임.
    24) 일본의 통조림 효시는 명치2년(1869) 나가사키현 松田雅典이 프랑스인 쥬리에게 罐詰製法을 말로 전해 듣고[口授] 실제 실험하였고, 또는 수입품을 모조하고 그리고 그 자신이 궁리한 것이 있다 이것이 일본 통조림의 효시였다고 한다.(片山芳吉, 「大日本水産史」, 有明書房, 1983, 54면).
    25) 二野甁德夫,『日本漁業近代史』, 株式會社 (株)平凡社, 1999, 102~103면.
    26) 片山房吉,『大日本水産史』, 有名書房, 1983, 533~534면.; 二野甁德夫,『日本漁業近代史』, 株式會社 (株)平凡社,1999, 103면.
    27) 片山房吉,『大日本水産史』, 有名書房, 1983, 534면.

     

     

    3. 대일본수산회(大日本水産會)의 결성

     

    메이지 정부가 추진한 근대화 정책에 따라 大日本農會(1881. 4. 5)ㆍ大日本山林會(1882. 1. 12)ㆍ大日本水産會(1882. 2. 12)가 설립되었다. 이들 조직은 농상무성의 大輔(차관) 시나가와 야지로(品川彌二郞)가 “국가의 번영과 인민의 복지를 증진하는 데는 무엇보다 먼저 원시산업(1차산업)의 발달을 도모하는 데 있다”고 주창한 것을 근거로 설립되었으며, 시나가와 야지로(品川彌二郞)는 세 단체에서 모두 초대 간사장을 맡았다.

    세 단체 중 대일본수산회의 간부는 수산 행정 담당자 중에서 선출하였고, 독일의 어업조합제도를 도입하였다28). 그리고 민간에서는 수산진흥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나가이 요시노스케(永井佳之輔)를 비롯한 지역 유지들의 적극적인 협력이 있었다.

    이처럼 1882년 2월 일본 최초 수산단체인 대일본수산회가 결성되어 고마츠노미야 아키히토(小松宮彰仁)30) 친왕이 회두(이후 총재로 개칭)로 추대되었고, 간사장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시나가와 야지로31)가 맡았다. 농상무성의 技師ㆍ技手 중에서 간사 또는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근대수산 지식을 갖춘 인재를 학예사로 촉탁하였다. 그리고 회원을 일본 전역에서 모집하였다. 대일본수산회의 초대 임원 구성은 <표 2>와 같다32).

     

     

     

     

    대일본수산회 임원들은 회두(총재)를 비롯해서 정부 관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초대 간사장, 시나가와 야지로는 1881년 농상무성 소보(少輔)39)였는데 1882년 대보(大輔)로 진급한 인물이며, 간사 중에는 1879년 독일 수산박람회에서 무라타 다모츠와 만나서 일본 수산 진흥을 위해 서로 의기투합을 하였다는 수산국의 지식인 마츠바라 신노스케와 일본 당대 최고의 수산전문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세키자와 아케키요가 있다. 의원 중에는『日本水産製品誌』의 편찬을 담당한 야마모토 요시카타가 포함되어 있다. <표 3>은 제1~7차 간사장의 내역이다40).

     

     

     

     

    <표 3>을 보면 대일본수산회의 간사장은 7차부터 이사장 회장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것은 대일본수산회가 1909년에 사단법인이 된 것과 관계가 있다.

    제7차 회장 마키 나오마사(牧朴眞)는 1928년 5월까지 장기간에 걸쳐 회장직을 역임하였으며, 같은 해에 회장직을 사임하고 부총재에 취임하였다41).

    대일본수산회의 간사장은 대부분 농상무성 수산국(수산과)의 국장(과장)이 겸임한 것을 보면 단순한 민간수산단체가 아니라 정부에서 관할한 반관반민단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대일본수산회의 총재의 경우, 청일전쟁 당시 정청대총독(征淸大總督)이었으며, 영국 에드워드 7세 대관식에는 메이지 천황의 대리인으로 참석했던 일본 황족의 전면에 내세웠던 인물이었다. 이와 같이 대일본수산회는 수산 관련 행정조직으로서는 발휘할 수 없는 사회적인 영향력과 응집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조직체였다. 더욱이 대일본수산회에서 수산전습소를 세웠고, 전습소 소장을 무라타가 맡은 다음, 무라타는 다시 의회를 통하여 수산전습소의 관영화를 달성하였다.

     

     

    28) 大日本水産会,『大日本水産会百年史』前編, 1982, 39~40면.
    29) 永井佳之輔(生年生没年不詳), 1880년 東京 水産社를 설립하고 편집장 中尾直治와 民間 第1号(일본 최초 수산잡 지) 『中外水産雑誌』를 동년 7월 창간하였고, 1882년 大日本水産會의 최초 발기인 중 한사람이다.
    30) 小松宮彰仁(1846-1903), 왕족, 1890년 육군 대장 승진, 국제친선을 목적으로 1886년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유럽 각국 방문, 1902년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에 메이지 천황의 대리자격으로 참석하였다. 일본 적십자 사, 대일본수산회, 대일본산림회, 大日本武徳會, 高野山興隆會 등 각 단체의 총재를 역임하였다.
    31) 品川彌二郞(1843-1900), 정치가, 1870년 독일ㆍ영국 유학, 内務大書記官, 内務少輔, 農商務大輔, 駐獨公使, 宮内省 

    32) 片山房吉,『大日本水産史』, 有名書房, 1983, 1029면; 大日本水産会,『大日本水産会百年史』前編, 1982, 32~33면
    33)『大日本水産史』에는 成嶋謙吉로, 『大日本水産会百年史』에는 成島謙吉로 기록되어 있다.
    34) 吉田淸成(1845-1891), 幕末 薩摩藩士, 명치시대, 外交官・農商務官僚, 1865年 영국ㆍ미국 유학하여 航海學을 배웠 지만 이후 政治学, 經濟學을 수학했다. 1887年 子爵을 수여받은 후 같은 해 元老院議官이 되었으며, 다음해(1888) 추밀원 고문관이 되었지만 병으로 사망(47세), 현재 「吉田清成文書」는 京都大学 日本史研究室에 보관되어 있다.
    35) 柳 楢悦(1832-1891), 일본 해군(최종 계급: 해군소장), 和算家(수학자), 측량학자, 정치가, 長崎海軍傳習所에 파견되 어 네덜란드式 航海術을 배워 西洋 數學에 기초한 측량술을 습득하였다. 메이지시대 영국 해군과 공동 해양측량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에서 해양측량의 제일인자로 일본 연안을 측량하고 해도를 작성을 하여 현재도 “日本水路 測量의 아버지”로 불린다. 1882年 大日本水産會 창립에 주력하였고 명예회원으로 추대되었으며 1888년 元老院議 官, 1890년 貴族院議員이 되었다.
    36) 村田 保(1842-1925), 명치시대 法制官僚, 정치가, 元老院議官, 貴族院勅選議員, 수산전습 2대 소장, 大日本水産會 副総裁, 大日本塩業協會 初代會長, 大日本缶詰業連合會初代會長 역임, 1871~1873년 영국 유학(형법), 1880~1881 년 독일 유학(行政裁判法, 憲法, 自治, 刑法)후 귀구하여 후 일본의 民法, 商法, 民事訴訟法 등 법률 제정을 담당, 독일 유학 당시 구나이스트와 베를린에서 개최된 만국수산박람회에서 일본의 수산 자원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 계기 가 되어 일본의 수산진흥을 위하여 ‘독일수산회’와 같은 기관인 대일본수산회가 설립하게 되었을 당시 어업법률 학 예위원으로 촉탁되었다. 1889年 수산전습소 소장, 1894年 청일전쟁 시에는 군부에 통조림 제조 납품, 1896년 일본 원양어업에 대한 보조금 요청안을 제출하였고, 1897年 遠洋漁業奨励法이 공포되었다. 1895年 水産調査会会長, 1896年 제2회 수산박람회 심사관장, 1898年 염업조사회 회장, 1912年 韓国併合記念章을 수여받았다.
    37) 田中 芳男(1838.9.27.~1916.6.22.),박물학자, 물산학자, 농학자, 원예학자, 男爵, 명치시대 동물원ㆍ식물원을 구상하였 고, 「博物館」이란 명칭을 만들었으며, 우에노 박물관 2대 박물관장, 元老院議官, 貴族院議員, 대일본산림회 회장, 일본원예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일본의 식산흥업 지도 및 기초 박물학 보급에 주력하였다. 파리(1867)ㆍ빈 (1873)ㆍ미국 필라델피아(1876) 등 만국박람회에 참가하였으며 1886년 ‘일본수산지’ 기획 편찬의 총괄책임을 맡았다.
    38) 牧 朴真(1854.4.26.~1934.4.29.), 일본 관료, 정치가, 실업가, 県知事, 衆議院議員, 1898년 11월 農商務省 수산국장, 大日本 水産會 理事長, 日本缶詰協會長, 大日本水産工芸協會長, 大日本水産會 副総裁 등 역임하면서 수산업 진흥에 주력했다. 
    39) 메이지정부 관청인 각 省에서 次官의 下位職에 해당하며 少輔의 상위가 大輔이다.
    40) 片山房吉,『大日本水産史』, 有名書房, 1983, 1031~1032면; 大日本水産会,『大日本水産会百年史』前編, 1982, 34~35면, 503면(1차, 4차의 취임된 月의 기록이 달라서 본고에서는『大日本水産史』의 기록을 기준으로 했다.
    41) 片山房吉,『大日本水産史』, 有名書房, 1983, 1032면; 大日本水産会,『大日本水産会百年史』前編, 1982, 35면. 御料局長, 樞密顧問官 등을 역임, 1884년 子爵이 됨, 大日本水産會 第一次幹事長(初代会長, 재임기간 1882.2.12.~ 1886.4.26.), 大日本水産會, 大日本農會, 大日本山林會의 3단체에서 모두 간사장을 겸임하였다. 

     

     

    4. 내국수산박람회(內國水産博覽會)의 개최

     

    일본의 수산 발달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내국수산박람회’이다. 제1회는 1883년 도쿄 우에노 공원에서, 제2회는 1897년 고베에서 각각 개최되었으며 농상무성 수산국(수산과)에서 주관하였다.

    제1회 수산박람회는 1883년 3월 1일부터 6월 8일까지 개최되었으며, 입장료는 2전(錢)42)이었다고 한다43).

    수산박람회 개최의 주요 취지는 일본의 각 지역에 남아 있는 어구와 어법 그리고 수산물의 제조법 등의 실물을 보고 우수한 것을 좀 더 보완하여 다소 뒤떨어진 지역에 보급시키는 데 있었다. 총책임자(간사)는 농상무성의 대서기관이었던 다나카 요시오(田中芳男)였다. 출품은 제1구에서 제4구로 나누었고, 1구역 세키자와 아케키요((關澤明淸), 2구역 마사키 타케시(眞崎健), 3~4구역 마츠바라 신노스케(松原新之助)가 각 구역의 심사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총괄은 심사장, 다나카 요시오가 맡았다. 총 출품 14,581건 중에서 1등 2건, 2등 15건, 3등 76건, 4등 168건 모두 261건이 선정되었다. 포상수여식에는 메이지천황이 직접 행차하여 격려했을 정도로44) 메이지 정부의 중요 행사 중 하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897년 고베에서 개최된 제2회 수산박람회는 제1회보다 한층 진보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총재는 고마츠노미야 아키히토(小松宮彰仁)친왕이었고, 부총재는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외 총 6명이 추대되었다. 전체 운영은 무라타 다모츠(村田保), 후지타 시로(藤田四郎), 마츠바라 신노스케(松原新之助), 시모 게이스케(下啓助) 등 농상무성에서 추진하였다.

    출품분야는 1) 어업, 2) 제조, 3) 양식, 4) 교육학예 및 경제, 5) 기계기구, 6) 水生동물[水族] 등 6개로 나누고 부문별 심사부장을 두었는데, 1)·2)의 심사부장은 제1회 수산박람회에서 총책임을 맡았던 다나카 요시오였다. 출품은 1) 어업 10,257건, 2) 제조 31,246건, 3) 양식 203건, 4) 교육 학예 경제 3,534건, 5) 기계 기구 779건, 6) 水生동물 229건이며, 관청에서 출품한 658건을 포함하여 총 46,906건이었다45). 제1회 박람회와 비교하면 3배 이상 증가하였다. 수산박람회가 종료된 후, 각 府縣의 수산담당자는 농상무성의 기사 및 수산 전문가에게 출품에 대한 평가와 지도를 받고 보완하여서 漁業誌ㆍ水産誌ㆍ漁具圖解ㆍ水産圖解 등을 간행하여 수산관계자에게 보급하여 수산진흥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42) 1880년 쌀 1되 가격이 평균 10.5錢(현재는 약 10,000원)이다. 입장료는 쌀 1되 가격의 ⅕에 해당된다(참고:http:// sirakawa.b.la9.jp/Coin/J077.htm-明治~平成 値段史).
    43) 片山房吉,『大日本水産史』, 有名書房, 1983, 494~495면, 500면;<水産博覽會規則> 제1조ㆍ제2조의 내용이다.
    44) 片山房吉,『大日本水産史』, 有名書房, 1983, 57쪽, 498~499면; 大日本水産会,『大日本水産会百年史』 前編, 1982, 46면.
    45) 片山房吉,『大日本水産史』, 有名書房, 1983, 510~513면.

     

     

     

     

     

    5. 수산전습소(水産傳習所)의 설치

     

    일본 정부의 수산진흥정책에 의하여 수산물의 해외무역 시장 개척 그리고 수출 확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수산물 수출품의 제품개량 및 해외구매자의 기호품 그리고 해외무역에 관한 기준 및 적합성 등 이에 따른 정보 및 사전 지식의 필요성이 요구되면서 근대수산교육기관 설립의 시급성이 주창되었다. 이에 대일본수산회가 주도하여 1888년 11월 29일 농상무성으로부터 水産傳習所의 설립 인가를 받고 이듬해 1월 20일 농상무성 관하의 목만정후생관(木挽町厚生舘)46) 내에 水産陳列所를 임시 敎場으로 하여 수산전습소 開所式을 거행하였다47). 수산전습소의 설립목적은 ‘水産傳習所規則’ 제1조에서 “本所는 어로, 제조, 번식(양식) 및 이에 관한 學科를 가르치고 學術을 實業上에 응용하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기되어 있다.

    또한 ‘大日本水産會水産傳習所事務規定’ 제1조에는 “수산전습소는 대일본수산회에 속한다”고 명기하여 수산전습소는 설립을 주도한 대일본수산회에서 관할한다는 것을 알렸다48). 초대소장은 농상무성 수산국장이었던 세키자와 아케키요(關澤明淸)가 겸임하였으며, 교사진은 농상무성 기술관 및 대일본수산회의 학예위원49) 및 그리고 농학ㆍ법학ㆍ농예화학ㆍ이학ㆍ공학ㆍ약학 분야의 박사 및 농학사로 구성되었다.

    수산전습소의 최초 교육과정은 1년<(豫科(3개월), 本科(9개월)>으로 정하여 예과에 해당하는 제1기 과목은 수산물의 구별, 제조, 번식(양식), 어로 대한 기초 학문과 물리학, 화학, 地文學, 기상학, 경제학 등이며, 본과에 해당하는 제2기~제4기 과목은 제조과, 번식(양식)과, 어로과, 氣像地文, 어업경제 등이었다. 보충과목은 영어ㆍ수학ㆍ부기ㆍ예체능 등이 있었다50). 그러나 1년 과정으로는 ‘수산전문인력양성’이 어렵다는 판단에서 그해 1년 반(예과 6개월, 본과 1년)으로 늘렸고, 또다시 1891년 6월에 2년(예과 1년, 본과 1년)으로 연장시켜 이수과목을 추가하여 필수적으로 2회 이상 양식(번식), 제조에 대한 현장 학습을 실시하였다51).

    수산전습소의 최초(1회) 입학생 수는 63명(1889년)이며, 졸업생 수는 49명(1890년)으로 약 78%였다. 제1회(1889년)부터 제13회(1897년)의 총 입학생 수는 954명이며 총 졸업생 수는 442명으로 총 입학생의 수에 비하면 총 졸업생의 수가 과반수가 되지 않는다. 그 원인은 수산전습소가 재정 궁핍과 적자 경영으로 1897년 3월 폐교되면서 당시 입학생 중 283명<제11회(1895년) 154명, 제12회(1896년) 68명, 제13회(1897년) 46명, 수산과 교원양성 15명>이 수산전습소를 승계했던 수산강습소로 모두 이적된 것에 있다. 이적된 283명을 감안하여 합산해 보면 총 졸업생 수는 약 75%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52).

    <표 4>는 수산전습소 졸업생의 취업현황이다53).

     

     

    46) 최초 1881年 1月 東京府 안에 설립된 明治會堂인데 당시 제일의 강연전용장소였다. 1884년 후생관으로 개칭되면서 木挽町에 있었던 것에서 木挽町厚生舘으로 불렀다고 한다.
    47) 이근우,「수산전습소의 설립과 수산교육」, 인문사회과학연구, 11-2, 2010, 110~112면; 片山房吉,『大日本水産史』, 有名書房, 1983, 628~629면; 加藤正誼,『大日本水産会水産伝習所沿革』, 大日本水産會水産傳習所, 1892, 1면, 3면, 6면, 15면.
    48) 加藤正誼, 『大日本水産会水産伝習所沿革』, 大日本水産會水産傳習所, 1892, 3면.
    49) 대일본수산회 학예위원은 대부분 농상무성의 技師와 技手이다.
    50) 이근우,「수산전습소의 설립과 수산교육」, 인문사회과학연구, 제11권 제2호(2010. 10.31), 115면; 片山房吉,『大日本 水産史』, 有名書房, 1983, 643~644면, 加藤正誼,『大日本水産会水産伝習所沿革』, 大日本水産會水産傳習所, 1892, 3면, 5~6면, 8면, 12~13면.
    51) 이근우,「수산전습소의 설립과 수산교육」, 인문사회과학연구, 제11권 제2호(2010. 10.31) 117면,
    52) 片山房吉,『大日本水産史』, 有名書房, 1983, 652~653면; 加藤正誼,『大日本水産會水産傳習所沿革』, 大日本水産會 水産傳習所, 1892, 35~36면.
    53) 片山房吉,『大日本水産史』, 有名書房, 1983, 653면; 이근우,「수산전습소의 설립과 수산교육」, 인문사회과학연구, 제11권 제2호(2010. 10.31), 135면.

     

     

     

     

     

    졸업생의 취업 비중이 가장 높은 것이 자영업이며, 자영업과 회사(상회)를 합하면 약 40%에 해당한다. 실업 분야에 취업 수가 많은 이유는 『大日本水産會水産傳習所沿革』의 첫 면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일본의 수산진흥을 위해서는 각 지역의 수산 實業者(또는 그 자녀)들이 근대 수산을 익히는 것이 우선이며, 이를 위해서 수산전습소의 설치가 급선무다”는54) 언급이 있다. 이와 관련해 볼 때 당시 수산전습소의 입학생은 각 지역의 수산 實業者, 특히 대일본수산회의 회원(또는 자녀)들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되며, 이들은 졸업 후에 대부분 자신들의 실업 분야(자영, 또는 회사)에 복귀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외의 졸업생도 대부분 수산 분야로 진출하였으며, 조선에서 수산업에 종사하거나 조선 주재 관청 또는 수산단체에 소속된 사람도 있었다. 『한국수산지』의 주요 조사자들 또한 수산전습소와 수산강습소 출신자들이 대부분이었다.

    1897년 3월 22일 칙령 제47호에 따라 수산전습소를 계승한 수산강습소가 수산조사소에 부설되었다. 강습소의 수업연한은 3개년으로 늘어났으며, 3학년은 어로, 제조, 양식 중에서 한 과목을 전공해야 했다. 그리고 별도의 현업과(現業科)55)를 설치해서 실업자(實業者) 또는 그 자녀들의 취학에 편의를 제공하였으며, 졸업생 가운데에 이수 과목에 대한 연구를 더 필요로 하는 학생들을 위하여 연구과를 설치하였고, 수업기한은 1년 이내로 하였다56). 수산전습소는 반관반민단체인 대일본수산회에서 관할하였지만 수산강습소는 농상무성에서 관할하였다. 즉 국가교육기관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래서 농상무성 수산국장이었던 후지타 시로(藤田四郞)가 소장을 겸임하였다57). 이처럼 메이지 정부가 근대적인 수산 교육 기관을 운영하면서 수산 분야 전문가들을 배출하게 되었다. 이들은 다시 전국으로 흩어져 각 수산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수산 분야의 지식 확산 및 수산 유용성에 관심을 증대시켰으며, 어로, 양식, 제조 분야의 근대화가 신속하게 진전되어 나가는데 이바지하였다.

     

     

    54) 加藤正誼,『大日本水産會水産傳習所沿革』, 大日本水産會水産傳習所, 1892, 1면.
    55) 本科는 어로과, 제조과, 양식과로 이루어져 있으며, 現業科는 巾着網, 遠洋漁業, 통조림[罐詰], 節類, 魚油沃度 등 실기를 위주로 하는 교육으로 수업은 1년 이내이다.『大日本水産史』, 片山房吉, 有名書房, 1983, 672면, 677면.
    56) 片山房吉,『大日本水産史』, 有名書房, 1983, 653~654면
    57) 片山房吉,『大日本水産史』, 有名書房, 1983, 652~654면; 農林省水産講習所,『水産講習所一覧』, 1928, 2면. 후지타 시로는 앞에서 언급한 농상무성의 농무국장(1893년 수산조사소 소장 겸임)이었는데, 1897년 수산국이 부활하면서 수 산국장이 되었다.

     

    Ⅲ. 수산 조사 시행

     

    1. 수산예찰조사(水産豫察調査) 실시

     

    1888년 4월 15일 농상무성 수산국에서는 당시 구미 각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수산에 관한 제반 사항을 참고해서 學理에 근거한 수산조사를 실시할 방침을 세웠다. 조사방법은 예찰조사와 본조사로 구분하였고, 우선 예찰 조사를 위하여 일본의 해역을 북해도를 제외하고 5해구(海區)로 나누어 각 해역에 담당조사원을 파견하여 장기간에 걸쳐 해안의 지세, 해저의 지형, 지질, 조류(潮流), 어획물의 종류, 생태, 어장, 어획방법 등 각 해역 생물의 종류 및 성질, 효용, 발육 시기, 이동, 난자(卵子), 어아(魚兒), 질병, 어구, 어법 등 수산물 및 어업의 상황 등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예찰조사가 실시되던 도중 1890년에 수산국이 농무국 수산과로 강등되었지만 예찰조사는 중단하지 않고 계속 실시하였다58). 1892년 예찰조사 완료 후에 『수산조사예찰보고(水産調査豫察報告)』 10권을 간행하였으나 수산통계가 완전하지 못하여 이를 보완하기 위해 수산조사항목 및 양식(樣式) 등을 일정하게 정하여 1893년 3월말까지 특별조사(훈령 제33호)를 실시하여, 1894년에 그 결과를 道廳과 각 府縣에 하달하였다. 또한 이 하달 사항 중에서 중요 사항만은 골라서 7개의 항목(① 수산업자, ② 수산업에 관한 토지 및 어획기간ㆍ계절, ③ 어선 및 어구, ④ 어획 및 제조, ⑤ 판매, ⑥ 수산업 경제, ⑦ 어장 및 해조류 채취장소)으로 분류하고 다시 100여 개의 항으로 한 것을 『水産事項特別調査』(1894)라는 제목으로 간행하여 수산관계자들에게 배부하였다59). 이렇게 조사된 자료들이 ‘일본수산지’ 내용의 바탕을 이루었다.

    일본 해역 수산예찰조사의 순서는 <표 5>와 같다60).

     

     

    58) 片山房吉,『大日本水産史』, 有名書房, 1983, 226면, 227~228면, 230면.
    59) 片山房吉,『大日本水産史』, 有名書房, 1983, 230~231면.
    60) 片山房吉,『大日本水産史』, 有名書房, 1983, 228~230면.

     

     

    2. 수산조사소(水産調査所) 설치

     

    1893년 4월 11일 내각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와 농상무대신,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郞)에 의해 수산조사소 관제(칙령 제21호)가 공포된 후 수산조사소를 설치하였다. 수산조사소에서 실시한 업무 사항은 다음과 같다(수산조사소 관제 제1조 중에서)61).

    수산조사소는 농상무대신이 관리하며 다음의 사항을 관장한다.

    1) 수산 동물 조사

    2) 어구어선어법 조사

    3) 어장 조사

    4) 수산물의 번식제조 및 어로 시험

    5) 제염 조사 및 시험

    6) 수산물 판로 및 조사

    7) 어업경제 및 통계 조사

    8) 수산에 관한 관행 조사

     

    위의 8개 항목은 어업ㆍ번식(양식)ㆍ제조ㆍ경제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실시하기 위하여 항목을 정한 것이다. 이것은 수산전습소의 본과 교육과정<어로과ㆍ번식(양식)과ㆍ제조과ㆍ어업경제 현장 실습(번식 및 제조는 필수적으로 2회 이상)과도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국가 재원 마련을 위한 수산물의 해외수출 확대를 위하여 계획된 것으로 생각된다.

    수산조사소의 초대 소장(책임 사무관)은 농상무성 농무국장 후지타 시로(藤田四郞)가 겸임하였으며, 1895년에는 보다 완벽한 수산 조사와 시험을 목적으로 수산조사소 관제(칙령 24호)를 개정하여 전임기술관을 발령하였다. 수산조사소의 조직은 소장, 기사 3명(가네다 기이츠(金田歸逸)ㆍ기시노우에 가마키치(岸上鎌吉)ㆍ야마모토 가츠지(山本勝次)), 기수 오쿠 겐조(奧健藏) 외 15명 그리고 서기 요시오카 데츠타로(吉岡哲太郞) 외 6명 모두 25명으로 구성되었다62).

     

     

     

     

    전임기술관으로 발령받은 가네다는 官報 제3827호 78면(1896년 4월 6일)에 明治 27~28년 전쟁(1894~1895년 전쟁, 청일전쟁)에서 공로를 인정받아 賞勳局으로부터 상금 15圓과 직급 11級俸을 하사받은 사실이 있다.

    이 관보를 통하여 가네다가 1895년 당시 농상무성 소속의 수산조사소의 기사로 재임 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호봉도 다른 공로자들에 비하여 비교적 높은 점에서 직책 또한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 가지 덧붙이면 가네다가 수상한 1896년은 ‘일본수산지’64)(1895) 3부작의 원고가 완성된 그 이듬해이다.

    1893년 수산조사소의 업무는 앞에서 전술한 바와 같이 8개의 항목이었는데, 1895년에 보다 완벽한 수산 조사를 위하여 전임 기술관을 발령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조사항목을 보면 1893년보다 1895년에 오히려 1개의 항목이 축소되어 7개의 항목으로 되었다. 1893년과 1895년의 수산조사소의 업무는 <표 6>과 같다.

     

     

     

     

    <표 6>과 같이 1893년과 1895년의 업무를 비교하면 1~6의 항목에는 변화가 없지만, 1893년 7과 8의 2개 항목이 1895년에 1개의 항목, 즉 ‘7 수산물, 수산물 제품, 염전 토양 등의 분석 감정’으로 수정되어 통합되었다65). 그러나 항목의 내용을 비교하면, 1893년 조사단계에 머물렀던 업무가 1895년에는 분석과 감정(鑑定)의 단계까지 끌어올려서 보다 조사내용이 진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수산조사소는 전임기술관을 비롯한 여러 기사들에 의해서 수산물의 조사 및 시험을 비롯하여 府縣에 설치된 수산시험장에 지역순회강연 등을 펼치는 등 수산진흥을 위한 업무가 활발하게 진행되었지만, 1898년 정부의 행정비용(政費) 절감 정책에 따라 수산조사소가 폐지되었다. 그러나 업무는 수산국 조사과에 인계되어 다소 축소되었지만 계속 진행하여 경과 및 결과 보고서가 나왔다고 한다66).

    앞에서 수산예찰조사(1888년~1892년)는 본조사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하여 실시한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예찰조사 이후 본조사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가 없다. 예찰조사가 완료된 다음해(1893)에 농상무성 안에 수산조사소를 설치하여 수산물의 조사 및 시험에 대한 업무를 체계화하여 진행하였는데, 이것은 수산예찰조사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근거를 들어보면, 우선 수산예찰조사를 주도했던 농상무성 수산국이 1890년에 폐지되면서 수산조사 업무는 같은 농상무성 관할의 농무국에 인계되어 그대로 실시하여 1892년 완료하였고, 바로 이듬해(1893년)에 농상무성 안에 수산조사소를 설치하면서 수산예찰조사를 인계받았던 농무국장이 초대소장을 겸임했던 점이다. 더욱이 수산조사소 소장(농무국장)은 1897년 수산국이 다시 부활될 때에 수산국장으로 임명되었다. 두 번째는 농상무성 소속의 기사(기수 포함) 특히 전임기술관을 수산조사소로 발령하여 보다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수산 조사 및 시험을 실시했던 점이다. 이를 종합해 보면 수산조사소의 전반적인 업무는 수산예찰조사를 근거로 하여 실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수산조사소의 수산조사 및 시험 업무가 본조사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이렇게 조사된 수산 조사 결과가 ‘일본수산지’ 3부작의 근간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61) 片山房吉,『大日本水産史』, 有名書房, 1983, 232면, 農商務省, 『農商務省沿革略誌』 第2編, 1892~1905년, 41~42면.
    62) 『大日本水産史』, 片山房吉, 有名書房, 1983, 233면, 236~237면, 전임기술관은 技師 중에서도 보다 수산 실무 경험 이 풍부한 사람을 임명한 것으로 생각된다.
    63) 片山房吉,『大日本水産史』, 有名書房, 1983, 236~237면, 農商務省, 『農商務省沿革略誌』 第2編, 1892~1905년, 43면.
    64) ‘일본수산지’의 3부작(1886~1895)의 『일본수산포채지(日本水産捕採誌)』의 편찬 담당자 중 1인이다.
    65) 片山房吉,『大日本水産史』, 有名書房, 1983, 236~237면.
    66) 片山房吉,『大日本水産史』, 有名書房, 1983, 237면.

     

     

    3. 수산조사위원회(水産調査委員會) 운영

     

    수산조사소 설치와 동시에 심의기관인 수산조사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책임사무관은 앞에서 언급한 농상무성의 농무국장이자 수산조사소 소장을 겸임하고 있는 후지타 시로(藤田四郞)이며, 위원장 및 위원은 체신성의 관선국장(官船局長)ㆍ농과 및 이과의 박사학위가 있는 대학교수ㆍ해군 대위ㆍ중앙기상대 기사ㆍ농상무성 참사관 겸 농상무서기관 등 각 분야에서 중요 인물들이 임명되었다. 위원 중에는 근대 수산의 선두에 있던 세키자와 아케키요 및 수산예찰조사를 맡았던 마츠바라 신노스케를 비롯한 담당조사관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임시위원 또한 농상무성의 기사(기수 포함)가 다수가 포함되어 있는데 수산예찰조사를 담당했던 시모 게이스케(下啓助)도 포함되어 있다67). 수산조사위원회의 임원들은 농상무대신의 추천에 의해 내각에서 임명하였으며, 각 분야에서 지식과 경험을 갖춘 사람들을 발탁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수산조사위원회에서 수산조사소의 업무에 대해 규정한 심의 내용이다68).

     

    1) 수산에 관한 조사 및 시험 사항

    2) 조사 및 시험의 위탁에 관한 사항

    3) 조사비의 용도

    4) 원양어업에 관한 사항

    5) 수산업 보호에 관한 사항

    6) 기타 농상무 대신의 자문[諮訽]

     

    위와 같이 분야별로 체계적인 심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67) 片山房吉,『大日本水産史』, 有名書房, 1983, 233~236면.
    68) 片山房吉,『大日本水産史』, 有名書房, 1983, 232~233면; 農商務省, 『農商務省沿革略誌』 第2編, 1892~1905년, 42 면; 칙령 제21호 수산조사소 관제의 제3조의 내용이다.

     

     

    Ⅳ. ‘일본수산지’의 구성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농상무성 수산국(수산과)에서는 수산진흥을 목표로 행정개편, 대일본수산회 설립, 수산전습소(이후 수산강습소) 창립, 수산예찰조사 실시, 수산조사소 및 수산조사위원회 조직, 내국수산박람회 개최, 府縣 수산시험장 설치 및 순회강연 실시 등 일본 전 지역까지 대대적인 사업을 전개하였다.

    ‘일본수산지(日本水産誌)’ 편찬 사업 또한 농상무성에서 주관하였으며, 편찬 감독을 맡은 다나카 요시오와 편찬담당자 7명은 수산국의 기사(기수) 또는 관료로 대일본수산회, 수산박람회, 수산예찰조사, 수산조사소 및 수산조사위원회 등 수산국에서 주관했던 일련의 사업에서 큰 활약을 하였으며, 당시 수산전습소에서 다나카 요시오는 評議員을, 편찬자 7명은 교사를 겸임하고 있었다.

    이들에 의해 편찬된 ‘일본수산지’는 그들의 경력의 연장선상에서 잘 다듬어진 근대 일본의 수산관련 대백과사전에 해당되며 일본 近代水産史의 중요한 연구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수산지’ 즉 『일본수산포채지(日本水産捕採誌)』ㆍ『일본수산제품지(日本水産製品誌)』ㆍ『일본유용수산지(日本有用水産誌)』 구성과 편찬담당자의 내역은 <표 7>과 같다69).

     

     

     

     

    ‘일본수산지’의 편찬 감독을 맡은 다나카 요시오는 일본수산사의 주요 인물 중 한사람이다. 박물학자(박물관장 역임)이면서 1881년 農商務省 農務局長을 역임하였고, 수산국의 대서기관으로 내국수산박람회<제1회(1883) 총책임 간사, 제2회(1897) 심사부장>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대일본수산회 제5차 간사장을 역임(1898~1900)하는 등 그의 이력과 공적은 대단하다. 이렇게 많은 공적을 이룰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보다 일본 최초의 이학박사가 되었던 이토 게이스케(伊藤圭介)72)의 문하생이었던 점을 들 수 있다. 이토 게이스케는 ‘데지마네덜란드상관(出島和蘭商館)’에 商館醫 자격으로 와서 난학교습소를 열었던 지볼트(Karl Theodor Ernst von Siebold)에게 식물학을 배운 것을 토대로 일본 최초로 린네의 분류체계를 소개했던 인물이며 본초학ㆍ박물학ㆍ난학ㆍ식물학 등 다방면으로 해박한 당대의 지식인이었다. 다나카 요시오 또한 학식이 뛰어난 스승에게서 배운 다양한 학문을 바탕으로 일본의 박물학계 및 수산 관련 학문 분야에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편찬담당자 7명에 대한 직책 및 경력 사항은 그들이 각자 담당했던 편찬 서적에서 언급하기로 한다.

     

    1. 『일본수산포채지(日本水産捕採誌)』

     

    『일본수산포채지』는 일본 전 지역에 현존하는 어구와 어법을 실제 조사하고 우수한 것을 발굴하여 어구의 구조와 조작방법, 어업형태 등에 관하여 종합한 것이다. 고문헌부터 최신 정보까지 참고하면서 거의 10년에 걸쳐 조사가 이루어져 완성되었다. 그러나 완성되던 해(1895)는 농상무성의 경제적인 사정으로 곧바로 편찬되지 못하였다.

    1910년에 水産書院이라는 출판사의 잡지(수산문고)에 『일본수산포채지』를 시작으로 간행하였으며 모두 4차례 간행되었다. 1차는 8차례 나누어 간행(1910~1912)하였고, 2차는 1차 간행한 것을 합본한 『일본수산포채지』(全)(1912)이며, 3차 三版(1929), 4차 四版(1935)이다. 4차에 걸쳐서 꾸준하게 간행된 것은 본 서적이 수산참고서로 수산관계자들에게 큰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최초, 8차례로 나누어 간행했던 『일본수산포채지』의 내역은 <표 8>과 같다75).

    『일본수산포채지』 편찬 담당자는 가네다 기이츠·다케나카 쿠니카ㆍ나카무라 리키치(中村利吉)이다.

    『일본수산포채지』의 범례에는 “첫째 본 서적은 그물어업, 낚시어업, 특수어업(雜魚具漁法)의 3편으로 나누어 순서대로 편술한다, 둘째 당시 일본 전국에서 현존하는 어구와 어법에 대하여 特長을 기술하고 어구의 구조 조작의 방법을 밝힌다. 셋째 본 서적은 水産書院의 水産文庫에 나누어서 게재한다”는 서술방식을 언급하였다76).

    그리고 서문에는 “전국 각지의 어구ㆍ어법ㆍ구조운용 등에 대하여 실물을 보고 조사 검토하여 우등과 열등을 가려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린 후 개량하여 자료를 모은 것으로 매우 필수적인 서적이다”임을 언급하여 수산관계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서적임을 강조하였다77).

    편찬담당자 중 가네다는 앞에서 언급한대로 농상무성 소속의 기수(이후, 기사)이며, 수산전습소 교사, 수산조사소 기사 그리고 수산시험장 순회 강연 등 자국의 수산 진흥에 많은 활약을 하였던 인물이다.

    각 부현의 순회강연 보고서 중에 1893년 후쿠시마현(福島県) 内務部에서 간행했던 『水産講話筆記』(金田歸逸, 河原田盛美 述)는 후쿠시마의 주요 연안의 사용 그물 및 그물구조와 사용법 그리고 수산물 유용성 등에 대하여 가네다와 가와라다 모리하루(河原田盛美)가 공동 조사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가네다가 담당한 福島県 宇多郡 磯部村에서 실시했던 ‘정어리착박(鰮魚窄粕) 제조과정’에 대한 내용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정어리는 식용보다 농작물(특히 면화)의 비료로 주로 사용되어 왔지만 ‘정어리착박제조과정’을 거쳐서 얻게 된 魚油는 自家 등화유로 쓰고, 나머지 찌꺼기를 비료로 쓰면 된다는 것이다. 착박제조 처리과정을 쉽게 이해하도록 ‘정어리착박(鰮魚窄粕)’을 위한 유수분리상자(油水分離箱子) 제작 방법과 착박 제조 방법에 대한 설명과 함께 간단한 그림을 그려 놓았다.

     

     

     

     

    69)『日本水産捕採誌』, 農商務省 水産局, 水産書院, 1911, 凡例.
    70) 大日本水産会,『大日本水産会百年史』前編, 1982, 50면.
    71) 가와라다 모리요시라고도 한다.
    72) 伊藤圭介(1803〜1901), 학자로서 최초 男爵이 된 인물이다. 본초학 박물학 난학(蘭學) 수학, 1827년 나가사키에서 지볼트(シーボルト)에게 植物學을 배웠으며, 지볼트에게 얻은 툰베르그(ツンベルク)『日本植物誌』를 기초로『泰西 本草名疏』를 저술하였으며, 일본에서 최초 린네(リンネ)의 체계를 소개했다. 1881년 동경대학 교수가 되었고 1888 년 일본 최초의 이학박사가 됨<출처:近代日本人の肖像(https://www.ndl.go.jp/portrait/datas/233.html?cat=30)>.
    73) 農商務省 水産局,『日本水産捕採誌』, 水産書院, 1911, 道家 齊의 序, 凡例.
    74) 農商務省 水産局,『日本水産捕採誌』(全), ㈜水産社, 1935, 末尾의 기록.
    75) 農商務省 水産局,『日本水産捕採誌』第1~8차, 1911년~1913년.
    76) 農商務省 水産局, 『日本水産捕採誌』, 水産書院, 1911, 凡例. 77) 農商務省 水産局,『日本水産捕採誌』, 水産書院, 1911, 道家 齊의 序. 
    78) 일본에서는 정어리류를 이와시로 통칭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정어리, 멸치, 보리멸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본고에 서는 鰮魚를 정어리로 기록한다.
    79) しいらづけ:대 다발 등으로 해면에 부설물을 만들어 닻 모양의 갈고랑이로 막아두고 이곳에 모이는 만새기를 어망 이나 낚시로 잡는 어업법, 동해(日本海) 각지에서 행하고 있다

     

     

    당시 어촌지역에 전기가 공급되지 않았던 점을 감안하면 ‘정어리착박제조방법’은 유용수산물의 최신 정보라고 할 수 있다80).

    정어리착박(鰮魚窄粕) 제조방법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정어리)油水分離箱子의 크기는 길이 5척, 폭 2척, 깊이 1.5척 정도이며, 상자 내부는 일정한 크기로 3칸(순서는 왼쪽부터 甲區⤑乙區⤑丙區 )으로 분리하여 각 분리된 판자의 윗부분에 구멍을 뚫는다.

    甲區에 끓인 정어리의 열즙을 부어넣으면 수분과 오물은 아래로 가라앉고 油分이 구멍을 통하여 乙區로 흘러들어가고 다시 乙區에 수분과 오물은 가라앉고 유분이 丙區로 흘러들어간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충분하게 분리된다. 그러나 이것은 精製油로는 용이하지 않으며, 自家燈火用으로 할 때는 다시 온도를 맞추고 ‘필터(ゴサ)81)에 걸러서 하는 것이 제일 간단하다.”

    이밖에 가네다는 1900년 조선 연해를 조사한 사실이 있다. 일본 정부에서 1897년 ‘원양어업장려법’을 발포(1898년 실시)하자 이에 농상무성은 원양어업(선박 및 선원) 실태 조사를 실시하였다. 가네다는 조선연해의 실태조사를 실시한 후『遠洋漁業奨励事業報告』를 제출했다. 주로 함경도와 강원도 일대의 지세 및 어장규모, 중요 어종 및 어획물 판매방법, 어선 등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조선연해로 출어하는 일본 어부들의 ‘조선연해수산정보지’라고 할 수 있다. 이 보고서에는 조선연해로 출어하는 일본 어부에 대한 장려보조금 및 지침 내용까지 첨부되어 있다82). 이것은 조선연해 출어에 대한 일본 어부를 대거 육성하기 위한 정부의 시책사업에서 실시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다케나카(1834~1896)는 대일본수산회의 발기인 6명 중 1인이자 초대 의원 12명 중 1인이었다. 또한 수산전습소의 교사로 담당 과목은 수산 대의(水産大意)였다.

    저서는 1887년 『방남포경지房南捕鯨志』, 1892년 『수산학대의(水産學大義)』, 1893년 『조선통어사정』<세키자와 아케키요(關澤明淸) 공저> 등이 있다. 수산 분야만이 아니라 민권운동에서도 잘 알려진 활동가였다. 『일본수산포채지』가 완성된 후 얼마 되지 않아 생을 마감하였다.

    나카무라 리키치(中村利吉, ?~1932)는 낚시 바늘 전문 제작자로 일본에서 최초로 낚시 바늘에 대하여 학문적인 면에서 체계화 시켰으며, 수산전습소 어로학과에서 낚시 바늘 제조기술을 가르쳤다. 저서는 『釣鉤圖譜』ㆍ『つり針圖譜』 등이 있다.

    『일본수산포채지』는 수산물을 포획하거나 채취하는 데 사용하고 있는 각종 기물을 소개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먼저 첫머리에서는 당시 사용되던 그물의 종류를 일정한 기준을 정하여 정확하게 분류하고 있다. 이는 메이지 시대 초기에 기존의 어업관행이 붕괴되고, 남획과 어업 분쟁이 빈번하게 일어난 상황과 관련이 있다.

    인구의 도시 집중과 수출 증대의 결과, 수산물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어민들 사이에 다양한 형태의 갈등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정부에서 남획을 금지하고 종천(種川)을 지정하여 어자원을 보호하는가 하면, 특정 그물의 사용을 금지하기도 하였다83). 이에 대하여 어민들은 금지된 그물을 미세하게 변경하여 다른 이름의 그물이라고 주장하면서 사용한 경우가 끊이지 않았다(一品兩名).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물의 구조와 명칭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80) 金田帰逸, 河原田盛美, 水産講話筆記, 福島県内務部, 1893, 7~8면(그림은 8면의 뒤의 별지에 있다. 鰮魚窄粕 제조 실험하는 중에 수분과 오물이 혼합되어 기름에서 악취 등의 문제점이 발생하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油水分 離箱子를 간단하게 그린 그림과 함께 사용법을 기록한 것이다.)
    81) ゴサ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의 사전 의미와 부합되지 않는 점에서 여과지에 해당하는 필터로 기록하였다.
    82) 金田歸逸,『遠洋漁業奨勵事業報告』, 農商務省水産局, 1903, 1면, 126~127면, 139~140면; 1883년 朝日通商章程과 1889년 韓日通漁章程이 체결되어 조선 연해의 동해와 서남해에서 일본 어부의 합법적인 어로가 이루어지고 있었지 만 청일전쟁(1894~1895)에서 승리하자 ‘원양어업장려법’을 내세워 조선연해의 지배권을 더욱 강화하고자 한 일본 정부의 시책이라고 할 수 있다.
    83) 高橋美貴, 앞의 논문, 180면.

     

     

    2. 『일본수산제품지(日本水産製品誌)』

     

    『일본수산제품지』는 당시 일본 각지에 남아 있는 수산물의 전통 제조방법 중 우수한 것을 선별하여 『和漢三才圖會』를 비롯한 여러 고문서와 「大日本水産會報告」 등의 근대 수산정보를 참고 정리하여 편찬하였다고 한다.

    『일본수산제품지』의 편찬 목적은 수산물을 개량하여 국민의 영양공급과 수산물 수출 확대화를 통하여 국가의 재원을 확보하는 데 있었다.

    『일본수산제품지』는 食用品·肥料品·工用品·藥用品의 4편으로 구성되었으며, 1913년부터 1916년까지 『일본수산포채지』를 이어서 수산서원 출판사의 수산문고 잡지에 간행되었다. 그러나 모두 간행되지 못하였으며, 제5차 第一編 食用品 第二章 植物 第一節 乾品類 第三十九 奴麻海苔를 마지막으로 종료되었다84). 제5차에 걸쳐 간행되었던 『일본수산제품지』 내역은 <표 9>와 같다.

    『일본수산제품지』는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인하여 농상무성에서 보관하였던 원본이 소실되었는데, 東京 水産社의 직원, 미야자키 겐이치(宮崎賢一)가 謄本을 소장하고 있었으므로 1935년 4월 5일 『일본수산제품지』(全)을 간행할 수 있었다고 한다85).

    『일본수산제품지』는 최초 5회 나누어 간행(1913~1916)된 것과 1935년에 간행된 전권(全卷)을 대조해 보면 분량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 이것은 『일본수산제품지』를 처음 간행(1913)할 때는 원본 그대로 간행하였겠지만 1935년 간행하는 시점에서 보면 원고가 완성된 1895년과는 40년이라는 시대적인 차이가 있다. 이 기간에서 수산물에 대한 기호품 및 해외 수출품 등에서 변화가 생겼을 것을 감안하면 다소 수정 작업이 필요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수산제품지』의 최초 간행한 것과 1935년 간행한 것을 대조하여 변경된 몇 가지의 예를 들면 <표 10>과 같다.

     

     

     

     

     

     

    위와 같이 변경이 있었던 것은 1935년 『일본수산제품지』(全)의 출판사의 서문에 “삽도(揷圖) 중에 원판(등본)이 선명하지 않은 것은 일부 수정하거나 완전히 삭제시켰다.”88)고 밝혀 놓았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에서 한 가지 예를 들면 ‘제1편 식용품-제2장 식물-제1절 건품류-제17 石+髮89)藻(エゴ)’의 경우에는 최초 간행되었을 때는 533면에 기록되어 있지만 1935년 간행된 전권에는 488면에 있다. 즉 45매의 분량 차이가 나는데, 이것은 1935년 전권을 간행하면서 훼손된 것과 선명하지 않은 것은 삭제 또는 수정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90).

    『일본수산제품지』의 편찬담당자는 야마모토 요시카다(山本由方)와 가와라다 모리하루(河原田盛美)이다.

    야마모토는 1882년 대일본수산회의 발기인 중 1인이면서, 議員 중 1인이었다. 또한 농상무성의 기수로 수산전습소의 교사를 겸임하였다. 수산계몽을 위한 순회강연을 위하여 1890년 후쿠이현(福井県)과 1891년 아오모리현(青森県) 등으로 파견되었다91).

    저서 『청국수산변해(清国水産辨解)』(1886)는 중국 수출 증대를 위하여 중국인의 기호에 맞는 수산물 제조법과 중국 수산물[魚介苔藻] 및 상업에 대하여 조사한 서적이다. 부록 「日淸貿易事情」에는92) 원활한 중국 무역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광동, 복건, 영파, 상해 등 중국 각 지역의 방언을 먼저 습득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야마모토 자신이 중국 어장을 조사할 당시 가장 큰 문제점이 언어소통에 있었음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말미에 중국인 소유 창고[漢口淸人所有倉庫之圖]와 서양인 소유 창고[漢口河邊西洋人所有倉庫之圖]의 그림이 첨부되어 있는데, 두 그림을 비교하면 중국인 소유의 보관창고 내부에는 집하된 물품이 보이지 않는 반면에 서양인 소유의 보관창고는 외관에 계단까지 조성되어 있어서 규모가 제법 큰 건물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하며 더욱이 창고 내부에는 수출입 상품들이 질서정연하게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쌓여 있는 모습을 그려 놓았다93). 이것은 당시 중국 조차지(상해)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상해에서 서양인들이 무역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것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으로 생각된다.

    가와라다(1842~1914)는 농상무성의 기수로 대일본수산회에서 학예위원을 맡았고 또한 수산전습소의 교사를 겸임하였다. 1881년 제1회 내국수산박람회에서는 출품 심사관 중 1인이었다. 수산 계몽을 위하여 펼쳤던 순회강연으로는 1888년 水産講話筆記(鳥取県農商課), 1889년 水産講話筆記(石川県勸業課), 1893년 水産講話筆記(福島県内務部, 金田帰逸, 河原田盛美 述) 등이 있다94).

    저서 『청국수출일본수산도설(淸國輸出日本水産圖說)』上ㆍ下(1886)는 일본 수산물 중에 중국으로 수출하는 약 50개에 대한 수산물의 명칭ㆍ종류ㆍ어채[採收]ㆍ제조ㆍ산지ㆍ산액ㆍ유용ㆍ수출 판로 등을 조사한 것인데95) 이것은 야마모토의 『청국수산변해(淸國水産辨解)』(1886)와 같은 시기에 조사된 것으로, 야마모토는 중국 현지의 수산 조사를 한 반면에 가와라다는 중국 수출품에 대한 자국산 수산물을 조사한 것이다. 두 서적은 중국 수출 극대화를 위하여 조사한 서적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조사한 내용은 『일본수산제품지』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일본수산제품지』의 첫머리에는 말린 오징어(鰑), 전복, 해삼, 상어지느러미가 실려 있는데, 이 품목은 모두 청으로 수출되는 대표적인 수산물이었다. 청으로 수출하기 위해서는 수산물의 형태나 포장 등도 잘 관리해야 한다는 내용뿐만 아니라, 중국 내에서 어떤 요리에 어떤 식으로 사용하며, 지역별로 선호하는 수산물의 종류가 다르다는 사실까지도 밝히고 있다96). 즉 『일본수산제품지』를 편찬하는 첫 번째 목적은 중국으로 수출하는 수산물의 제조방법과 판로를 알리는 데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4) 『日本水産製品誌』의 전체 분량의 약 2/3 정도에 해당된다.
    85) 農商務省 水産局, 『日本水産製品誌』(全), 株式會社 水産社, 1935, 출판사의 서문[はしがき].
    86) 용상어ㆍ조기 등의 부레를 건조한 식품, 중국 요리에 쓰임.
    87) 鮪는 참치를 말함.
    88) 農商務省 水産局, 『日本水産製品誌』(全), 株式會社 水産社, 1935, 출판사 서문(はじがき).
    89) 『일본수산제품지』에는 石+髮는 하나의 한자(‘石髮’)로 표기되어 있지만 현재의 사전에서 찾을 수가 없다.
    90) 農商務省 水産局, 『日本水産製品誌』(全), 株式會社 水産社, 1935, 488면(최초 간행된 『日本水産製品誌』에는 533 면에 기록). 石+髮藻(エゴ)는 모자반[馬尾藻]의 해초류에 착생하는 해초를 건조한 것이라고 본문에 기술되어 있지만 현재, 石+髮藻(エゴ)에 대한 해조류를 찾지 못하였다.
    91) 福井県内務部, 『水産講話筆記』, 1890; 青森県内務部, 『水産講話筆記』, 1891.
    92) 山本由方, 『清国水産辨解』, 農商務省 水産局, 1886, 凡例.
    93) 山本由方, 『清国水産辨解』, 農商務省 水産局, 1886, 121면, 141~145면.
    94) 鳥取県農商 , 『水産講話筆記』, 1888; 石川県勸業 , 『水産講話筆記』, 1889; 金田帰逸, 河原田盛美, 『水産講話筆 記』, 福島県内務部, 1893.
    95) 河原田盛美, 『清国輸出日本水産図説』上巻, 農商務省水産局, 1886, 凡例.
    96) 『일본수산제품지』, 1~96면.

     

     

    3. 『일본유용수산지(日本有用水産誌)』

     

    『일본유용수산지』의 편찬 담당자는 가토 마사요시(加藤正誼)와 가시와라 타다요시(柏原忠吉)이다. ‘일본수산지’의 편찬사업에 착수할 당시 이들은 모두 농상무성의 소속이며 수산전습소의 교사를 겸임하고 있었다. 가토는 수산대의(水産大意)를, 가시와라는 영어를 담당하였다.

    『일본유용수산지』는 『일본수산포채지』와 『일본수산제품지』와 같이 10여 년에 걸쳐서 조사하여 완성된 서적이지만 현재 『일본유용수산지』의 원고가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일본수산제품지』의 서문에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인하여 농상무성에서 보관하던 『일본수산제품지』의 원본이 소실되었다’97)는 기록을 근거로 당시 『일본수산포채지』ㆍ『일본수산제품지』ㆍ『일본유용수산지』 즉 ‘일본수산지’ 3부작의 원고를 같은 장소에 보관했다고 가정한다면 관동대지진 때 모두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수산포채지』와 『일본수산제품지』는 등본이라도 남아 있었지만 『일본유용수산지』의 경우는 간행되지 못한 채 원본이 소실되었다면 그 내용을 알 수가 없다.

    『일본수산제품지』의 범례에는 “동식물의 종류ㆍ성질 등의 사항은 『일본유용수산지』에 편찬되었으므로 생략한다”98)고 하였으므로, 유용수산물의 종류와 성질 등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동시에 『일본유용수산지』는 수산물의 명칭을 통일하려는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메이지 유신 이전에는 일본이 봉건적인 지배구조였고, 국가 전체를 통괄하는 정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결과 각종 용어가 통일되지 않은 것이 많았다. 특히 수산물의 경우가 더욱 심각한 상황이었다. 한 물고기에 대해서 엄청나게 많은 방언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 이름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외형이 아니라 근대적인 분류학적인 기준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나아가서 일본어로 이름을 통일한 다음에는 한자도 통일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일본유용수산지』가 가장 먼저 편찬된 것도 그 때문이다. 『일본수산제품지』에서도 『일본유용수산지』에서 정한 한자를 따르되, 다만 정해지지 않은 수산물에 대해서는 속자를 사용하거나 새로운 한자를 만들어 쓴다고 하였다.

    1889년 6월 「일본수산제품분류표」ㆍ「일본수산포채기분류표(日本水産捕採器分類表)」ㆍ「일본유용수산분류표(日本有用水産分類表)」가 대일본수산회에서 간행되었다. 우선 세 분류표의 제목을 『일본수산포채지』ㆍ『일본수산제품지』ㆍ『일본유용수산지』의 서명을 그대로 가져와서 붙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이 분류표는 ‘일본수산지’ 3부작의 편찬 감독을 맡은 다나카 요시오(田中芳男)가 전부 교열(校閱)하였고, 「일본수산포채기분류표」는 가네다, 「일본수산제품분류표」는 가와라다, 「일본유용수산분류표」는 야마모토의 편집[編選] 절차를 거친 후에 간행하였다99).

    『일본유용수산지』에는 어떤 종류의 유용수산물이 어떻게 분류되어 있는지, 유용수산물의 사용 용도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일본유용수산분류표」는 『일본유용수산지』를 근거로 해서 작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유용수산분류표」의 분류형식은 유용수산물을 먼저 동물문과 식물문으로 크게 나누고 동물문 아래로 어부(漁部)-연체부(軟躰部)-갑각류(甲殼類)-수충부(水蟲部)-수수부(水獸部)-파충류(爬蟲類)의 6개 부문으로 나누었으며, 식물문 아래로 수약부(水藥部)-수초부(水草部)의 2개 부문으로 나누었다100). 이 수산물 분류형식은 일본 최초로 근대적인 동식물 분류법에 의해 분류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일본수산제품지』에서 품목의 순서를 중요한 것을 먼저 하고, 굳이 동식물학상의 분류에 의거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일본유용수산지』가 동식물학상의 분류 즉 「일본유용수산분류표」의 순서대로 배열된 문헌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101).

     

     

    97) 農商務省 水産局, 『日本水産製品誌』(全), 株式會社 水産社, 1935, 서문.
    98) 農商務省 水産局, 『日本水産製品誌』(全), 株式會社 水産社, 1935, 凡例.
    99) 農商務省 水産局, 「日本水産製品分類表」ㆍ「日本水産捕採器分類表」ㆍ「日本有用水産分類表」, 大日本水産会, 1889. 
    100) 農商務省 水産局, 「日本有用水産分類表」, 大日本水産会, 1889; 서경순ㆍ이근우, 「『한국수산지』의 내용과 특징」, 『인문사회과학연구』20-1, 2019, 150면.
    101) 『日本水産製品誌 』 凡例.

     

    Ⅴ. 결 론

     

    수산물은 메이지시대 이전에는 일본의 식생활에서 단백질의 주된 공급원이었다. 구미의 각국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에 출품 및 견학을 통하여 수산물 유용성의 가치를 인식하게 되었으며, 수산의 선진 기계와 최신 정보 등이 일본으로 도입되면서 국가의 재원 마련을 위한 수산진흥사업이 대대적으로 실시되었다.

    일본 정부는 수산 업무 전담부서인 수산과(이후 농상무성 수산국)을 설치하였으며, 민간에서도 수산진흥에 뜻을 모은 각 지역의 유지 특히 수산실업가들의 주창으로 일본 최초의 수산단체인 대일본수산회가 결성되었다. 또한 이 단체가 주도하여 수산전문교육기관인 수산전습소가 설립되어 근대학문을 익힌 박사학위 소유자 및 수산국의 관료 등으로 구성된 교사들에 의하여 근대수산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수산전습소는 세계 최초의 ‘수산전문교육기관’이자 일본 수산교육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102).

    농상무성에서 실시한 수산진흥사업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무엇보다 내국수산박람회 개최를 들 수 있다. 당시 유럽에서 개최되던 만국수산박람회와는 비교할 정도는 아닐지라도 일본 각지에서 수산 관련한 어구 및 어법 그리고 수산물 제조법 등이 한 곳에 모아져서 출품에 대한 실태조사가 이루어졌던 점과 아울러 都市에 국한된 행사가 아닌 전국에서 참여하여 ‘수산정보교류장소’가 되었던 점, 그리고 일반인들의 주목을 끌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또한 박람회가 끝난 후에도 각 府縣에서 여기서 입수한 새로운 정보를 첨부시켜서 다양한 어업(수산)지를 간행하여 수산관계자들의 어업과 수산제조기법의 향상에 일조한 점이다. 또한 수산물 해외수출을 위하여 우선 學理에 근거한 수산예찰조사를 실시하였고, 이어서 수산조사소에서 보다 체계적인 수산물 조사 및 시험을 실시하였으며 또한 농상무성 技師(技手)들이 府縣에 설치된 수산시험장을 비롯한 어촌지역으로 순회하여 수산 계몽에 앞장선 결과 다양한 『水産講話筆記』가 간행되어 수산관계자들에게 수산 정보를 제공하였다.

    이처럼 농상무성 수산국에서 수산진흥을 위해 실시했던 수산 조사와 여러 사업을 통하여 축적된 자료들은 ‘일본수산지’ 내용의 바탕을 이루게 되었다.

    1886년 농상무성에서 편찬 착수하여 1895년 완성된 『日本水産捕採誌』ㆍ『日本水産製品誌』ㆍ『日本有用水産誌』 즉 ‘일본수산지’ 3부작의 편찬담당자들 또한 모두 농상무성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수산전문교육기관인 수산전습소(이후 수산강습소)의 교사, 대일본수산회ㆍ내국수산박람회ㆍ수산예찰조사·수산조사소ㆍ수산순회강연 등 농상무성에서 실시한 여러 사업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였던 인물들이었다.

    ‘일본수산지’ 3부작은 근대 일본의 수산진흥을 위해 실시하였던 사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편찬담당자들의 수산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편찬된 서적으로 고문헌과 근대 수산 지식과 기술을 망라한 수산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102) 이근우,「수산전습소의 설립과 수산교육」, 『인문사회과학연구』11-2, 2010, 110~111면.

    Figure

    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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